영화 '국화꽃 향기'는 한국에서 멸종위기 장르에 속하는 정통멜로영화다. 반갑긴 하지만, 10년이 지난 지금 다시 보면 여간 촌스러운 것이 아니다. 배우들의 딱딱한 말투는 박해일의 앳된 얼굴만큼이나 낯설고, 개연성 없이 지고지순한 순애보는 장진영의 나팔바지만큼이나 어색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활기찬 마로니에 공원이나 대학독서동아리, 풋풋한 섬마을 봉사, 라디오 사연들은 아련했던 유년기를 떠오르게 한다.
동명 소설인 김하인 작가의 장편소설 '국화꽃 향기'를 영화화한 탓에 영화 '국화꽃 향기'의 흐름은 매우 빠르다. 특히 영화 초중반은 다양한 상황들이 눈 깜짝할 새 에 차창밖의 가로등처럼 휙휙 지나간다. 이 때문에 관객들은 시간이 지날수록 배우의 깊은 감정선을 따라가지 못하고, 스토리의 당위성까지 의심하게 된다.
이정욱 감독은 이 같은 영화의 속도감을 연극스러운 연출로 버무리는 재치를 보여준다. '씬'이라기보다는 '막'이라는 표현이 어울릴 만큼 단호한 화면 전환과 짧게 치고 빠지는 배우들의 호흡과 연기는 미리 약속된 무대 연기를 보는 듯하다. 공간감을 이용해 창문 안의 실내와 창문 밖의 실외를 한 컷에 담아버리는 구도 역시 연극적인 향기를 물씬 풍기고 있다.
'국화꽃 향기'의 음악 역시 영화와 맥을 같이 한다. 맺고 끊음이 간결해 감정의 여지가 남지 않고, 지저분하게 씬을 넘나들 만큼 꼬리가 길지도 않다. 이 같은 음악의 특징은 후반부 들어 빛을 발한다. 죽음을 다루는 무거움 속에서도 호들갑 떨지않고 주제넘게 오버스럽지도 않으며 그저 덤덤히 자신의 자리를 지킨다.
'국화꽃 향기'에는 전반적으로 좋은 음악들이 많이 수록돼있다. 필두에 있는 것은 역시 성시경의 '희재'다. 특히 입대한 박해일의 훈련장면과 결혼한 장진영의 신혼생활이 교차 편집된 몽타주 뒤로 '희재'가 흐르는 장면은 세계 어느 곳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한국멜로영화만의 백미다.
'희재'뿐만 아니라 중간중간 삽입된 올드팝들도 영화를 고급스럽고 클래식하게 만든다. 특히 1975년 발표된 Jon Mark의 'Signal Hill'이나 재즈 하모니카의 신 Toots Thielemans이 연주하는 'Old Friend' 등 오래된 팝 발라드 콜렉션은 퇴근한 아버지의 희미한 코롱 냄새처럼 아련하다.
2008년 2월, 영화 '국화꽃 향기'가 개봉하고 7개월 후 장진영은 실제 위암 말기 판정을 받았다. 장진영의 마지막은 '국화꽃 향기'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이듬해인 2009년 5월, 장진영은 남편 김영균과 함께 미국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당시 장진영은 빨간 장미꽃을 들고 결혼식장에 입장했고, 기다리던 남편 김영균은 "평생 당신만을 사랑하겠다"고 고백했다. 결혼식을 마치고 이들이 부부로 함께 살아간 시간은 정확히 4개월뿐이었다.
'국화꽃 향기' 속 장진영은 "후배 주제에 사랑한다고 말하면 웃을 거예요?"라는 스무 살 박해일의 질문에 이렇게 대답한다. 쿨하고 유쾌한 21세기형 사랑과는 조금 거리가 먼 촌스럽고 구질구질한 한 마디였다. "내가 생각하는 사랑은 그래. 상대를 책임지겠다는 (무지막지한) 의지가 포함되어 있어야 사랑이라고 생각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