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칼럼] 투사(鬪士)가 사는 아파트

입력 2014-10-31 10: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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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재석 부동산시장부장

김부선이 돌아왔다. 배우로서가 아닌 ‘난방 투사(鬪士)’라는 새로운 타이틀로.

그의 폭로로 아파트 비리 논란이 이슈가 됐다. 그는 27일 참고인으로 국정감사에 출석해 아파트 비리를 ‘주거악법’으로 규정하면서 비리 근절에 국회와 정부가 나서줄 것을 눈물로 호소했다.

그는 단숨에 스포트라이트를 받았다. 그도 그럴 것이, 유명 연예인이 국감장에 나온 것은 흔치 않은 일이기 때문이다. 평소 국감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취재진이 몰려와 카메라 플래시를 터뜨려댔다.

그는 ‘난방 투사’라는 애칭에 대해 “영광스러운 이름 만들어주셔서 감사하다”고 했다.

그런데 왠지 안쓰럽다. 그의 ‘영광’이라는 표현이 곧이곧대로 들리지 않는다. 내겐 ‘상처투성이’로 들린다.

현재 우리는 10명 가운데 6명 이상이 아파트에 살고 있다. 80~90년대 유행했던 ‘내집 마련의 꿈’을 꾸며 일개미처럼 저축한 결과다. 그땐 10년이면 아파트 한 채를 꿈꿀 수 있었던 시절이다. 지금은 어떤가. ‘꿈’이란 말이 쏙 빠진 채 ‘내집 마련’으로 바뀌었다. 아파트 한 채 마련하기가 그만큼 힘들어졌다는 얘기다.

엊그제 통계청과 고용노동부, 국민은행 자료를 비교한 경실련 조사를 보면 집 한 채 마련하기가 ‘하늘의 별 따기’라는 것을 당장 알 수 있다.

전문대 이상 맞벌이 신혼가구(평균나이 남성 33세, 여성 29세)가 아파트 전세를 얻기 위해서는, 중간 가격이 서울 2억8000만원, 수도권 2억1000만원이라고 가정했을 경우 서울 28.5년, 수도권은 21.1년의 기간이 소요된다.

이는 4년 전보다 약 11년(서울), 8년(수도권) 큰 폭으로 늘어난 기간이다. 전세가 이 정도니 내집 마련은 두말할 나위 없다.

그렇게 십 수년 동안 이 악물고 저축해 마련한 아파트가 전쟁(戰爭)의 서막일 줄이야.

아파트에 살려면 3번의 전쟁을 치러야 하는 게 어느덧 현실이 되어버렸다.

내집 마련을 위해 ‘쩐의 전쟁’, 이웃과 조화를 위해서는 ‘내면과의 전쟁’, 재건축 비슷한 이야기가 툭 나오면 그때부터 ‘핏대 전쟁’을 치러야 한다.

동시에 인격(人格)은 ‘이중인격’을 요한다.

한 마디로 ‘돈’ 앞에선 용맹한 ‘투사’가 되어야 하고, 10명 중 9명이 경험한 ‘층간소음’상대인 이웃에게는 자비로운 ‘부처’가 되어야 한다.

이만하면 아파트가 삶의 휴식처가 아닌 휴전 없는 전쟁터로 보아도 되지 않을까.

여기에 요즘은 ‘복마전(伏魔殿)’을 방불케 하는 각종 비리와의 전쟁도 치러야 하니 투사가 되지 않고서야 어디 발붙이고 살겠나.

“미혼모로 살면서 30년 만에 난생 처음 내집을 마련했다”는 김부선씨가 ‘상처투성이’ 투사가 된 연유이다.

이번에 난방비 문제만 불거졌지만, 그동안 숱한 비리가 있었다는 것을 지자체나 정부가 모를 리 없다.

관리비 도둑질에 허위계산서, 칼로 긁는 통장변조는 기본. 보험가입, 승강기 유지보수, 놀이터 설치 및 개보수, 도색, 정화조, 알뜰시장 등등 각종 커미션을 챙기는 것을 보면 비리 백화점이 따로 없다.

서울시만 보면 시가 올해 4차례 아파트 관리비 비리 실태조사에 나서 위법행위 254건을 적발했다. 그러나 95%가 단순 계도인 솜방망이 처분만 받았다.

그렇다 보니 국토교통부가 집계한 전국 아파트 관리비 비리는 2011년 814건에서 지난해 1만1323건으로 14배 폭증했다. 2012년 발생한 강도 범죄 총 2643건에 견줘도 4배가 넘는다.

한해 전국적으로 12조원 이상 걷히는 아파트 관리비를 두고 일부에서 ‘눈먼 돈’이라고 하는 말이 괜한 게 아니다.

개인이 내부 고발을 하려면 이사를 각오한 ‘왕따’는 기본이고, 김부선씨와 같이 개인이 소송비용을 감당해야 하기에 비리를 들춰내기란 여간 어렵지 않다.

아파트가 개인재산 영역이어서 정부, 지자체가 적극 나서지 못하는 사각지대에 놓여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렇다고 매년 12조 이상의 돈이 걷히고, 범죄가 득실대는데 언제까지 두 손 놓고 있을 것인가.

정부와 지자체가 앞장서 아파트 관리를 준공영제로 바꾸는 등 비리가 싹 틀 수 없도록 제도 마련을 서둘러야 한다.

그리고 드러나는 관리비 비리를 일벌백계(一罰百戒)해야 한다. 동시에 입주자들 역시 적극적인 관심을 가져야 한다. 둘 중 하나만 느슨해도 비리를 근절할 수 없을 지경까지 됐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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