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명예회장은 창업주인 이원만 선대회장이 1935년 일본 오사카에서 모자 사업을 시작할 당시 15세의 나이에 일본으로 건너가 공부를 하면서 아버지의 사업을 돕기 시작했다.
해방 후 이 창업주는 일본 사업을 정리하고 귀국한 뒤 정계에 진출했으며 이 명예회장은 경찰이 돼 잠시 공무원 생활을 하기도 했다.
이후 이 창업주는 다시 일본으로 건너가 1951년 삼경물산이란 무역회사를 세우며 나일론 사업에 뛰어들었다. 건강 문제로 경찰을 그만둔 이 명예회장은 1954년 삼경물산 서울사무소를 맡아 운영하면서 사업에 복귀했다.
한국전쟁 이후 나일론 수요가 급증하자 이 명예회장은 부친을 도와 1957년 대구에 코오롱그룹의 모태인 한국나일론을 설립하고 국내 첫 나일론 공장을 건설하면서 국내 화학섬유시대를 열었다.
이후 이 창업주는 숙원이던 정계에 다시 진출했고 이 명예회장은 1977년 삼촌이던 고 이원천 코오롱TNS 전 회장에 이어 코오롱그룹 대표에 취임했다. 이때 한국나일론은 한국포리에스텔과 합병하면서 상호를 코오롱으로 바꾸고 새롭게 출발했다.
이 명예회장은 취임 후 적극적인 연구개발(R&D) 투자로 기술혁신에 속도를 냈다. 이에 코오롱은 1980년대 필름·산업자재로 사업 영역을 넓혔으며, 1990년대 초극세사를 이용한 고부가가치의 첨단 섬유제품을 개발했다.
이 명예회장은 1996년 장남인 이웅열 코오롱그룹 회장에게 경영권을 넘겨줄 때까지 20년 가까이 코오롱그룹을 이끌며 국내 섬유산업을 주도했다. 이 명예회장은 2세대 경영자지만 창업주인 부친을 도와 창업 초기부터 회사의 기틀을 다져 재계에서 창업 1.5세대로 불리기도 한다.
경영 외에 다방면에 관심이 많았던 고인은 스포츠 육성에도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1970년 여자실업농구연맹회장을 시작으로 대한농구협회장(1980년), 협회 명예회장(1983년) 등을 지냈다. 2002년 한국일본이 공동주최했던 월드컵 조직위원장, 대한골프협회장도 지냈다.
고인은 사회공헌에도 적극 나섰다. 2001년 자신의 호 ‘우정’을 딴 우정선행상을 만들었다. 자식이 부모를 살해하는 패륜 범죄가 잇따르자 미담을 발굴해 널리 알리자는 뜻이었다. 지난 4월엔 14회를 맞은 시상식에 직접 나서기도 했다.
그림에 심취했던 이 명예회장은 1992년 고희기념, 2001년 팔순기념전에 이어 2009년 미수(88세) 기념전 등을 열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