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실리콘밸리'라고 하면 경기 성남 판교 테크노밸리와 구미공단 등이 생각나지만 선뜻 한 군데로 콕 집어 떠올리기는 어렵습니다. 그만큼 IT, 전자기기 제조업체가 모인 곳을 상징하는 곳이 없다는 방증이죠.
그러나 1980년대까진 한국의 실리콘밸리라 하면 딱 한 곳이 꼽혔습니다. 바로 서울 종로구 종로3가 변에 있는 세운상가입니다. 이곳은 1987년 용산 전자상가가 생기기 전까지 한국 디지털 산업의 중심지로 군림했습니다.
세운상가의 '세운'이란 '온 세상의 기운이 모여라'를 의미합니다. 1968년 건축가 김수근이 설계하고 서울시가 지원해 종로 3가와 퇴계로 3가를 잇는 8-18층 건물 8개를 지어 조성됐습니다. 현대상가, 세운상가, 청계상가, 대림상가, 삼품상가, 풍전호텔, 신성상가, 진양상가로 구성됐죠.
전성기 이곳은 '세운'이란 이름에 걸맞았습니다. TV와 전화기, 심지어 전기조차 생소했던 시절부터 한국의 모든 가전제품과 조명 등이 판매됐죠. 반도체 업체부터 스피커, 조명 등 전기가 들어가는 모든 제품이 거래됐습니다. 상가 내 빈 상점이 없을 정도로 호황을 누렸습니다.
건물이 세워질 당시부터 이곳은 의미 깊은 곳이었습니다. 한국 최초의 주상복합 건물로 1~4층은 상가, 5~17층은 주거공간으로 설계됐죠. 기와집과 복층 양옥이 일반적인 당대의 건축문화에선 혁신이었습니다. 언론에서도 세운상가의 건립을 대서특필할 정도였습니다.
그러나 40여 년의 세월이 지난 현재는 초라합니다. '한국의 실리콘밸리'로 불렸다는 사실조차 잊혀졌습니다. 1970년대 말 강남권 개발로 인한 거주민의 이주, 1987년 용산 전자상가 설립으로 직격타를 맞으며 침체기를 맞더니 1990년대 세운상가 철거 및 녹지축 조성논의가 시작됐습니다. 그리고 지난 2009년 종로3가 대로변에 위치한 현대상가가 철거돼 공원으로 변경됐습니다.
현재 건물 외부는 곳곳이 부식투성이입니다. 건물의 축대를 담당하는 철골들 역시 녹이 슬어 위태위태합니다. 난간의 시멘트는 떨어져 나가 큰 균열이 곳곳에 보입니다. 한때 최첨단 주상복합이라는 명성은 온데간데없이 도심 흉물로 변한 것이죠. 그 주변부로는 개발의 손길을 피해 간 빈민가와 난잡한 전선이 뒤엉켜있습니다. 슬럼화된 세운상가 인근은 21세기 서울과는 다른 분위기를 풍깁니다.
남은 상점 가운데는 불법 도청 장비 판매와 불법 약품을 취급하는 곳도 생겨 불법의 온상이 됐습니다. 대로변 입구부터 '도청 장비, 비아그라 판매' 등이 적힌 표지판이 곳곳에 눈에 띌 정도죠.
이젠 과거의 영광도, 건축학적 특이성도 남지 않은 세운상가. 그러나 서울시는 이곳에 대한 보전 계획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2003년 청계천 복원사업과 함께 추진되던 세운상가 일대의 철거형 개발을 보전형 개발로 바꾼 것이죠.
반세기 가까운 세월을 위태로이 버텨온 세운상가. 보전형 개발이 맞는 걸까요. 이곳에 더 이상의 활력이 찾아볼 수 없습니다. 평일에도 내부에선 상인들의 실랑이도 흥정도 없습니다. 가끔 손님들이 들릅니다만, 이곳을 찾아오는 이들은 옛 추억에 잠겨오는 이들뿐입니다. 도심 슬럼화의 중심인 이곳을 과거의 영광만으로 보전 결정을 하기엔 무리가 있어 보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