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 한 생각] 2.15 南山可移(남산가이)
한 번 내린 결정은 바꿀 수 없다
임철순 주필 겸 미래설계연구원장
‘남산가이’는 문자 그대로 풀면 남산을 옮길 수 있다는 뜻이다. 얼핏 우직하고 끈질기게 노력한다는 ‘우공이산(愚公移山)’과 비슷한 말 같다. 하지만 원래는 남산은 옮기더라도 다른 무엇은 안 된다는 말의 일부다. 그래서 ‘굳은 결심이나 결정이 흔들리지 않는다’는 뜻으로 자리 잡게 됐다.
<구당서(舊唐書)>의 ‘이원굉전(李元紘傳)’에 이런 내용이 있다. 당의 태평공주(太平公主:663?∼713)는 중국의 유일한 여황제 무측천(武則天)의 막내딸로, 남의 재물을 멋대로 빼앗고 갑질을 하는 개차반이었다. 그녀가 사찰의 석마(石馬, 일설에는 맷돌)를 가져가자 한 승려가 탄원서를 냈다. 장안(長安)의 옹주군(雍州郡)에서 호적 관리와 민사소송을 맡는 사호참군(司戶參軍)이었던 이원굉은 석마를 돌려주라고 판결했다. 그러나 태평공주가 두려웠던 이원굉의 상관 두회정(竇懷貞)은 판결문 수정을 종용했다. 이에 대해 이원굉은 판결문의 뒷면에 “남산은 옮길 수 있지만 판결은 고칠 수 없다[南山可移 判不可搖]”고 썼다.
여기 나오는 남산은 당의 수도 장안 남쪽에 있는 종남산(終南山 해발 2,604m)을 말한다. 종남산은 황제가 있는 곳, 임금이 있는 곳의 별칭이기도 하다. 임금이 그립다는 말을 ‘종남산이 그립다’고 표현하곤 했다. ‘종남산이 지름길’이라는 종남첩경(終南捷徑)은 쉽게 벼슬하는 길이라는 뜻이다. 우리나라 경남 밀양, 전북 완주, 함남 북청에도 종남산이 있다.
그런데 그 사건은 그 뒤 어떻게 됐나? 여러 기록을 뒤져봐도 판결의 엄정성만 강조돼 있을 뿐 물건의 반환 여부를 알기가 어렵다. 요즘 주요 판결마다 시비와 논란이 끊이지 않는데, 사법부와 법관은 ‘남산가이’의 자세를 잃지 말고 스스로 권위와 신뢰를 굳게 지켜야 할 것이다. 그러려면 당연히 폭 넓고 공정한 판단을 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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