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인생광맥은 조물주가 매일 입금한 8만6400초”
명함은 역사다. 현재의 명함을 갖기까지, 많은 명함이 내 호주머니를 떠나갔다. 여기 누구보다 깊이 있는 명함을 가진 사람이 있다. 어렸을 때 절도로 소년원도 갔다왔다. 지금 하는 일은 노무사. 그런데 얘기를 들어보니 이 사람 인생, 롤러코스터다. 소년원에서 나와 ‘여전’한 인생을 살 수 있었지만, 그것을 ‘역전’으로 바꾼 사나이. 노무사라는 명함을 가진 구건서의 ‘He Story’다.<편집자주>
부드러운 인상이다. 전화를 받는 목소리는 매너가 넘쳤고, 사람에게 풍기는 미소에서는 푸근함이 묻어났다. 그러나 악수를 할 때 내미는 손은 예사롭지 않았다. 사무실에 앉아서 일을 하는 사람답지 않게 두껍고 다부졌다. ‘반전이 있는 사람이구나!’ 솥뚜껑만한 큰 손을 보고 기자는 직감했다.
40년 전 소년원에서 ‘살아남아야 된다’는 생각만으로 하루하루를 버텼던 소년. 그 소년의 2015년 명함에는 노무법인 더 휴먼의 회장이자 공인 노무사라는 직함이 자랑스럽게 새겨 있다. 무일푼 인생에 처절함과 절박함이 더해지자 노력이라는 동아줄이 내려왔다. 그 동아줄을 붙잡고 오로지 성공이라는 한 곳만 보며 올라왔다. 공부의 절대 시간이 부족한 것은 그에게 변명이 되지 않았다. 그의 명함이 더욱 빛나는 이유다.
그를 만난 곳은 신사동의 한 갤러리. 사진전이 열리는 곳이었다. 이제는 사진에 관심을 가져보고 싶어 친구가 회장을 맡은 동아리가 연 사진전에서 당번을 하는 날이었다. 노무사 구건서. 그의 얘기를 듣다 보니 기자에게 내민 하얀 명함 속에서 깊게 팬 주름이 보이기 시작했다. 참 고생이 많았다.
◇ 첫 번째 명함, 건달과 택시 기사
“세상에 대한 분노뿐이었어요. 중학생 때 지나가던 아줌마 가방을 훔쳐 소년원에 갔습니다. ‘나는 왜 이렇게 못사는 집에서 태어나서 이렇게 힘든가’ 하면서 부모님 원망도 많이 했었죠. 나 자신에게 문제가 있는 줄 모르고 남 탓, 환경 탓하기 바빴던 거죠.”
그렇게 꼬박 1년을 소년원에서 지냈다. 복역 후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밑천이 들지 않고, 육신을 쓰는 일뿐. 가방끈은 턱없이 짧았고, 어떤 일을 펼치기엔 땡전 한 푼 없었기 때문이다. 그 상황에서 그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막노동, 노점상, 포장마차, 엿장수나 고물장수 같은 것이었다. 일을 어느 한곳에 정착하기란 쉽지 않았다. 학연, 지연, 혈연이 전무한 상태에서 세상은 그에게 투쟁의 대상이었다.
지금은 그 당시의 자신에 대해 “그때는 건달이었죠. 뭐”라고 표현하며 웃어넘기지만 말이다. 갈피를 잡지 못하던 구씨가 마음을 잡을 수 있었던 것은 아내 유명자(60) 씨의 역할이 컸다. 1981년부터 약 9년간 택시 기사를 하면서 노무사 공부에 매진할 수 있었던 것도 어디로 튈지 몰랐던 구 씨를 끝까지 믿어 준 아내 덕분이었다.
“이런 나를 믿어주는 아내와 아들을 보니 이런 생각이 들더라고요. ‘마누라랑 자식새끼는 굶기지 말아야겠다’고 말이죠. 그때부터였을 겁니다. 운전수로 세상을 마치는 것을 너무 억울할 것 같다고 생각한 것이.”
◇ 두 번째 명함, ‘이가 없으면 잇몸으로’ 노무사 구건서
“택시 기사를 하던 중 존 네이스비츠의 <메가 트렌드>라는 책을 읽었습니다. 그 책을 보니 블루칼라는 멸종하고, 화이트칼라 같은 지식 노동자들의 시대가 올 것이라고 하더군요. 그때 결심했습니다. 노무사에 도전해 보기로. 인생을 이렇게 살 수는 없겠다는 생각이었죠.”
24시간 격일제 운전. 그야말로 중노동이었다. 운전수로 평생 살기는 억울하다는 생각이 들면서 삶의 터닝 포인트를 만들어야 한다는 것을 절실히 느꼈다. 더 이상은 몸으로 때우며 살기는 싫었다.
소년원 시절에도 놓지 않았던 독서와 택시 회사 노조활동을 하며 틈틈이 배워 둔 노동법. 이것을 바탕으로 노무사에 대한 도전의 칼을 갈았다. 독서광이었던 그에게 공부는 오히려 체질이었다. 하지만 택시 운전을 하면서 공부의 절대 시간을 확보하기엔 많은 무리가 따랐다. 그래서 구 씨는 자투리 시간을 최대한 활용했다. 자동차 핸들에 법전이나 노무사 관련 책을 오려 붙여 달달 외웠다. 차량 정체 시간이나 신호 대기 시간이 그의 공부 시간이었다. 그뿐만 아니었다. 손님을 태우면 노무사 관련 테이프를 틀어 눈이 아닌 귀로 공부를 했다. “아, 칙칙하게 이런 거 틀지 말고 음악 좀 틀어주세요.” 손님들의 볼멘소리가 나올 만했다.
그만의 택시 독서실(?)은 그렇게 꼬박 3년을 쉬지 않고 달렸다. 지성이면 감천이라고 했던가? 명문대 졸업생도 합격하기 어렵다는 노무사 시험을 전국 4등이라는 성적으로 합격했다. 하루살이처럼 살던 구 씨의 노무사 합격은 ‘인생 여전’이 아닌 ‘인생 역전’의 시작이었다. 구 씨는 그 당시를 이렇게 술회한다.
“리더스 다이제스트에서 본 문구가 있습니다. ‘하루는 8만 6400초다. 이것을 돈으로 바꿔라’라는 것이었죠. 저에게 깊은 영감을 준 이 문구를 전 이렇게 바꿨습니다. ‘조물주가 매일 8만 6400초를 무통장으로 입금해준다고 생각하자. 대신 12시가 되면 못 쓴 것에 대한 값은 다시 빼간다’라고요. 저에게 주어진 소중한 시간을 값지게 쓰고 이것이 쌓이니 재산이 되더군요.”
◇ 세 번째 명함, Keep Looking, Don’t Settle!
“저는 이제 나이 60을 기점으로 제3의 인생을 사는 기로에 서 있습니다. 첫 번째 인생이 나를 위한 처절한 투쟁의 역사였다면, 두 번째 인생은 노무사로 활동하면서 사회와 소통하는 과정이었죠. 이제 세 번째 인생은 남과 더불어 살고 싶습니다. 할 수만 있다면 제가 가진 것을 사회에 보태고 나누고 싶어요. 그래서 내비게이터십과 인생학교에 열중하고 있습니다.”
그의 명함은 이제 새로움이 더해지고 있다. 그가 쓴 책 <나는 기적을 믿지 않는다>의 표지에 쓰여 있는 ‘Keep Looking, Don’t Settle!(안주하지 말고, 계속 찾아라)’이라는 말에 걸맞게 명함도 미래를 지향한다. 그의 명함 오른쪽 상단에 쓰여 있는 횡성군 발전위원회 자문위원, 신선마을 촌장 겸 인생학교 교장, 내비게이터십코칭 대표 등의 직책은 구 씨가 어떤 미래를 그리고 있는지 잘 보여준다. 명함 중앙에 ‘공인노무사’이라는 이름이 크고 위엄 있게 박혀 있음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오른쪽 상단에 위치한 직책들을 소개하는 데 더 많은 시간을 할애한 구 씨다. 이제는 노무사에 대한 것은 많이 내려놓은 듯했다.
“고생한 것이 있으니 지금 명함이 더 빛나는 것이죠. 하지만 여기서 멈추면 안 되죠. 명함도 마찬가지로 매년 바뀌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바뀌지 않는 명함은 정체하는 인생과 다름없기 때문이죠. 직책이 있든 없든 말이에요. 직책이 있든 없든 미래는 그려볼 수 있으니까요.”
◇ 명함 오른쪽 상단, 그의 새로운 역할
횡성군 발전위원회 자문위원
구 씨가 횡성군에 인생학교를 차리고, 자리를 잡을 예정이라서 횡성군에 직접 요청했다. 횡성 발전에 기여를 하면서 상생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횡성에 기업 유치를 하고 귀농·귀촌인을 유치하기 위해 갖가지 아이디어를 제공하는 역할을 한다.
신선마을 촌장 겸 인생학교 교장
횡성의 신선봉이라는 곳 앞에 세워지는 인생학교. 아직 학교는 없다. 하지만 곧 생길 학교에 책임감을 부여하기 위해 교장이라고 기재했다. 이곳은 아이를 키우는 30~40대 부모들이 자유롭게 놀고, 아이들과 소통할 수 있도록 도와줄 것이다. 구 씨가 여기서 하는 역할은 마을의 어른이자 할아버지로서 젊은 부모들과 아이들에게 인생 조언을 아끼지 않는 것이다.
내비게이터십코칭 대표
자신의 강점과 단점을 찾고, 그것을 바탕으로 내가 어떤 것을 해야 하는지 인생 설계도를 그려주는 일이다. 사실 시니어들은 은퇴 이후 미래 설계도가 있고 없고의 차이가 크기 때문에 인생 설계도를 제대로 그려보는 것도 중요하다.
피플스그룹(現) 부이사장
HR의 노동조합 형태인 피플스그룹이다.
<사진 이태인 기자 teinny@etoday.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