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5월 10일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이 급성 심장경색으로 입원한 직후 그룹 안팎에서 제기된 가장 큰 현안은 경영승계 문제였다.
갑작스레 경영권을 물려받게 된 이재용 부회장이 과연 '천재 경영자'로 불린 이 회장의 역할을 대신할 수 있을지에 대한 의문이었다.
당시 외신의 반응을 살펴봐도 이같은 분위기가 지배적이었다.
미국의 경제전문지 포브스는 "이 부회장이 다년간 경영 수업을 거쳤지만 그에 대한 의문은 여전히 남아 있다"고 지적했고 영국의 파이낸셜타임스(FT)는 "투자자들이 삼성그룹 경영 승계 문제가 삼성의 장래를 둘러싼 불확실성을 키우는 것으로 보고 있다"고 전했다.
비록 원했던 방식의 데뷔는 아니였지만 이 부회장은 '당황하지 않고' 자신만의 색깔을 서서히 드러내기 시작했다.
수개월이 지난 뒤 나온 블룸버그의 평가는 분명 달라져 있었다.
블룸버그는 "그의 절제된 감각과 친근한 태도, 유창한 언어 능력 등은 삼성의 초점을 하드웨어에서 소프트웨어와 콘텐츠, 국제적 제휴 확대로 옮기는 데 도움을 줄 것"이라고 분석했다.
이 회장이 갑자기 입원해 공백을 맞게 된 지 1년, 요즘은 오히려 아버지와 다른 이 부회장의 경영 스타일과 그동안의 성과가 집중적으로 조명받고 있다. 그룹 안팎의 불안한 분위기는 어느새 잊혀지고 있는 듯하다.'
◇ 지구 한 바퀴 돌며 아버지 공백 메웠다
이 회장이 건재한 상황에서 세간의 초점은 늘 이 회장 본인이었다.
아버지인 이 회장이 간헐적으로 해외 출장을 위해 입·출국할 때나 서울 서초동 삼성전자 사옥으로 출근할 때 이 부회장은 지근거리지만 뒷자리를 지켰다.
그저 자리를 지킨 것만은 아니다. 전면에 나선 적은 없지만 핵심 사업에 포괄적으로 관여하면서 경험을 쌓았고 글로벌 기업 대표와 국가 정상들을 만나면서 조용히 인맥을 넓혀왔다는 것이 삼성 내부 관계자들의 설명이다.
아버지와 아들은 경영 스타일은 물론 외부 노출 방식에서도 차이를 보였다.
'은둔의 경영자'로 불린 이 회장은 주로 자택 근처에 있는 삼성그룹 영빈관인 '승지원'에서 경영을 챙겼다.
이 회장의 동선은 베일에 가려져 있는 경우가 많았고 간헐적으로 모습을 드러낼 때마다 집중적인 스포트라이트를 받았다.
언론은 이 회장의 일거수 일투족에 주목했고 삼성 안팎의 현안이나 국내외 경제 상황 등에 대한 이 회장의 언급은 경제계는 물론 전체 사회에 던지는 메시지로 받아들여졌다.
이 회장의 입·출국 시에는 그룹 미래전략실장인 최지성 부회장은 물론 삼성전자 주요 사장단까지 동행하거나 보좌하는 경우가 많았다.
아들은 아버지와 달리 출장이나 특별한 약속이 없을 경우 늘 삼성전자 서초사옥으로 출근한다.
아침 출근 시간대 출근하는 이 부회장을 모습을 발견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다.
해외 출장을 오갈 때 이 부회장 곁에는 별다른 수행 인력이 없다. 사장단이 함께하는 경우도 있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비즈니스 차원의 동행이라는 설명이다.
이 부회장은 언론에 노출될 때 아버지와 달리 '특별한 코멘트'는 하지 않지만 굳이 뒤로 숨는 모습을 보이지도 않는다.
삼성이라는 대규모 기업집단의 실질적인 리더로서 이 부회장은 지난 1년 간 광폭 행보를 펼쳤다.
북미와 아시아, 유럽 등을 가리지 않고 오간 거리만 지구 한 바퀴에 이를 정도의 강행군이었다. 국내를 방문한 주요 기업인이나 유력인사들과의 만남도 소홀하지 않았다.
삼성전자, 나아가 삼성이 직면한 문제를 외부의 시각으로 냉정히 바라보고 미래 먹거리를 발굴하기 위해서는 소통과 협업의 정신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는 판단에서다.
지난해 7월 미국 아이다호주 선밸리에서 개최된 앨런앤드코 미디어콘퍼런스에서는 애플 최고경영자(CEO) 팀 쿡, 구글 CEO 래리 페이지와 함께 있는 모습이 포착됐다.
한달여 뒤 삼성전자와 애플은 미국을 제외한 독일과 영국 등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던 특허 소송을 전격 취하했다.
9월에는 방한한 사티아 나델라 마이크로소프트(MS) CEO와 만나 특허분쟁 문제에 대해 협의했다.
미국 스포츠용품 업체 언더아머의 케빈 프랭크 CEO, 스위스의 다국적 제약기업 로슈의 세베린 슈완 CEO, 마르틴 빈터코른 폴크스바겐 회장, 조 케저 지멘스 회장, 호주의 광산재벌인 지나 라인하르트 회장 등 글로벌 기업인들과도 협력방안을 논의했다.
세계 경제의 핵심으로 떠오르고 있는 중국의 시진핑(習近平) 국가주석, 차세대 지도자 후보 중 한 명으로 꼽히는 후춘화(胡春華) 광둥(廣東)성 당서기, 경제 분야를 맡고 있는 마카이(馬凱) 부총리 등 중국의 현 실세는 물론 미래를 책임질 차세대 지도자들과도 활발히 교류했다.'
◇ 속도감있는 사업구조 재편…갤럭시S6라는 결과물도 내놔
삼성그룹은 지난 1년 간 이 부회장의 주도 아래 많은 변화를 겪었다.
젊은 3세 경영인으로서 이 부회장은 새로운 사업 기회를 찾아 삼성이 갖추지 못한 기술과 해외 기업을 받아들이는데 주저하지 않았고 외형이나 명분에만 치우치지도 않았다.
이 부회장이 전면에 나선 지난해 5월 이후 삼성전자는 무려 8개의 해외 기업을 사들였다.
브라질의 프린팅솔루션 업체 심프레스, 미국의 모바일 결제 솔루션업체 루프페이와 공조전문 유통회사 콰이어트 사이드, 발광다이오드(LED) 상업용 디스플레이 업체 예스코 일렉트로닉스, 클라우드 솔루션 전문업체 프린터온 등 삼성에 가치를 더해줄 수 있는 유망 기업이나 기술을 적극적으로 사들였다.
단순히 외형 불리기에만 집중하지는 않아 지난해 11월에는 삼성종합화학, 삼성테크윈 등 방위산업 및 석유화학분야 4개 계열사를 한화그룹에 매각하면서 그룹의 사업구조를 전자와 금융이라는 큰 틀 아래 슬림화했다.
M&A와 계열사 매각이 중장기를 내다본 행보였다면 지금 당장의 곳간을 채우기 위한 노력은 가시적인 성과로 나타났다.
대표적인 것이 스마트폰 갤럭시S6와 S6엣지다.
전작인 갤럭시S5는 이 회장 입원 이전에 공개됐고 지난해 9월 IFA 2014에 앞서 공개된 갤럭시노트4와 노트엣지는 이 부회장이 초기 과도기에 있을 무렵 세상에 나온 만큼 갤럭시S6야말로 '이재용 체제' 하에서 나온 첫 번째 결과물로 해석된다.
누구도 따라올 수 없었던 하드웨어 성능에다가 애플의 전유물이던 혁신적인 디자인을 더한 갤럭시S6는 갤럭시S4의 7천만대를 넘어서 역대 갤럭시 시리즈 중 베스트셀러 모델이 될 것이라는 전망마저 나오고 있다.
아래로 향하던 삼성전자의 실적에 브레이크를 걸고 반등의 토대를 마련한 점 역시 이 부회장의 경영 능력을 방증하는 것 중 하나라는게 그룹 내부의 시각이다.
2013년 3분기 10조원이 넘는 사상 최대의 영업이익을 올렸던 삼성전자는 공교롭게도 이 회장이 쓰러진 지난해 2분기 이후 실적이 악화돼 3분기에는 4조600억원으로 영업이익이 반토막났다.
애플과 중국 저가업체의 공세로 스마트폰 수익성이 악화된 것이 주요 원인이었지만 '카리스마 경영자'인 이 회장의 부재에 따른 것 아니냐는 호사가들의 검증되지 않은 얘기가 흘러나왔다.
삼성전자는 그러나 지난해 4분기 5조2천900억원의 영업이익으로 반등에 성공한 뒤 올해 1분기 6조원에 가까운 영업이익을 올리면서 본격적인 회복세를 나타냈다. 2분기에는 8조원대의 영업이익을 올려 다시 정상궤도에 오를 것이라는 전망이 지배적이다.
이 부회장 입장에서는 삼성전자의 실적 악화라는 위기 상황을 무사히 넘기는 구원투수 역할을 훌륭히 해 낸 셈이다.
'본격적으로 몸이 풀린' 이 부회장이 앞으로 어떤 성적표를 받을지가 주목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