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년 개봉한 영화 ‘장화, 홍련’은 10년이 더 지난 지금도 회자하는 수작이다. 기존 공포영화에서 찾아볼 수 없었던 탄탄한 스토리와 세련된 연출, 배우들의 호연은 한국 공포, 스릴러의 새 장을 열었다는 평을 얻었다. “‘장화, 홍련’은 배우로 나를 탄생시킨 작품이다. 영화적 경험이나 연기에 대해 알게 해준 작품”이라는 임수정의 말처럼 그녀의 발견은 ‘장화, 홍련’이 가지고 있는 수많은 영화사적 의미 중 하나다.
임수정의 필모그래피는 드라마 ‘미안하다 사랑한다’(2004), ‘싸이보그지만 괜찮아’(2006), ‘행복’(2007), ‘김종욱 찾기’(2010), ‘내 아내의 모든 것’(2012) 등으로 이어졌다. 그녀는 다작하는 여배우는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CF 활동에 치중하는 ‘신비주의’ 여배우에 속하지도 않았다.
주목할 점은 임수정이 작품을 통해 자신의 영역을 구축했다는 것이다. 가볍게는 ‘동안 미모’의 대표주자라는 칭호부터 여배우로서 그녀가 가지고 있는 색깔, 가치관이 작품을 통해 묻어나오며 지금의 배우 임수정을 만들었다. 다소 난해했던 차영군 역부터 사랑하는 사람을 향한 지고지순한 은희 역, 달콤 살벌하면서 똑 부러지는 정인 역까지, 연기 변신의 스펙트럼 또한 넓다.
전작 ‘내 아내의 모든 것’으로 수상한 청룡영화상 여우주연상은 그녀 연기 인생에 큰 터닝 포인트가 됐다. 영화 ‘은밀한 유혹’으로 3년 만에 스크린에 복귀한 임수정은 어느새 ‘여배우’의 향기를 진하게 풍긴다. 빚에 허덕이는 가난한 아르바이트생의 처절함부터 돈 많은 회장을 유혹하기 위한 치명적인 매력의 여성미까지 극과 극의 인물 묘사가 펼쳐진다.
농익은 연기보다 더 반가운 것은 연기에 대한 임수정의 진지한 자세와 깊은 내공이다. 그녀는 최근 인터뷰에서 “오랜만에 촬영현장에 있었는데 정말 행복했다. 오감을 열고 새롭게 느껴지는 것을 스펀지처럼 빨아들여 캐릭터로 표현하는 작업이었다. 그동안 연기적인 무게감에 짓눌려 있었다면 이젠 함께 만들어가는 작업이 즐겁다”고 말했다. 배우로서 자세와 촬영에 임하는 여유는 전도연, 김혜수 등 걸출한 여배우를 떠올리게 한다.
임수정의 진화는 여배우 기근 현상에 시달리는 충무로에 단비와 같은 변화다. 치명적인 아름다움 위에 캐릭터를 입히는 과정은 여배우의 숙제이자 상당한 내공이 필요하다. 몇 안 되는 여배우의 대열에 임수정이 꾸준한 작품 활동과 노력으로 입성했다는 점이 영화 관계자들의 반가움을 자아내고 있다.
앳됨과 성숙함이 공존하는 임수정의 마스크는 세월이 지날수록 가치를 더한다. 그녀의 동안 미모는 나이가 들어도 건재했고, ‘임수정 뱀파이어설’은 언제나 그녀를 따라다니는 꼬리표와 같다.
“동안이라고 해주면 그냥 감사하다. 30대 중반을 살짝 넘은 여배우인데 곧 40대가 될 거고 50대가 된다. ‘나중에 어떤 모습이면 좋을까’ 생각을 했는데 나이에 맞는 자연스러운 아름다움을 가지고 있는 배우가 됐으면 좋겠다”고 말하는 그녀의 마음가짐과 솔직함에서 그녀가 왜 ‘여배우’의 내공을 풍기는지 엿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