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동안 아이가 얼마나 아프고 힘든 상태였는지 제대로 살피지 못한 점, 오히려 아빠인 제가 아이의 아픔을 부추기고 더 크게 만든 점을 마음속 깊이 반성합니다.”한 아버지의 사과 편지다. 김정욱 씨다. 김 씨의 딸은 바로 최근 수많은 신문과 방송에서 미국 하버드 대학과 스탠퍼드 대학의 동시합격 했다며 경이의 찬사를 받다가 합격 조작이 드러나 졸지에 비난의 대상으로 전락한 미국 토머스제퍼슨 과학고등학교 3학년 김정윤 양이다. 신문, 방송 , 인터넷 미디어 등 수많은 언론이 기본적인 사실 확인조차 하지 않은 채 ‘한인 수학 천재소녀 김정윤양, 하버드·스탠퍼드대 합격 번갈아 다닌다’라는 미주중앙일보 기사를 받아쓰기에 급급했다. 미국 한인 커뮤니티에서 조작 의혹이 제기돼 일부 언론이 취재하면서 김양의 하버드와 스탠포드 입학과 경력이 조작된 사실이 밝혀졌다.
김양에 대한 황당한 오보 사태는 한국 언론의 속보경쟁과 취재관행이 낳은 것이지만 그 기저에는 한국 사회와 미디어의 근본적인 문제가 자리하고 있다. 이 문제는 많은 전문가가 지적하듯 김정윤 양의 이번 행동과 무관하지 않다.
김정윤 양의 하버드와 스탠퍼드 대학 동시합격 조작사건과 언론의 오보사 태는 학벌 지상주의에 사로잡힌 한국사회의 병폐의 결과물이다. 김상봉 전남대 교수가 ‘학벌사회’에서 주장하듯 중세의 신분제가 계층이동의 상한선을 규정했다면 이제 한국 사회는 학벌이 취업, 승진, 결혼을 포함한 계층이동의 준거가 되고 있다. 엄기호 박사 역시 ‘이것은 왜 청춘이 아니란 말인가’를 통해 “어느 대학을 나왔는가는 곧 그 사람 인생 전체의 운명이 된다. 한국 사회는 대학 서열이 인생에서 대부분의 차이와 차별을 결정하는 체제다”고 비판한다.
개인의 능력에 대한 공정한 평가를 배제한 채 오로지 학벌이라는 간판 하나만으로 모든 것을 판단하는 학벌 지상주의는 우리의 인식과 사회를 강력하게 지배하고 있다. 한국교육개발원이 학부모 1500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교육여론조사에서 성공·출세 요인으로 학벌과 연줄을 꼽은 학부모 비율이 2006년 33.8%에서 2008년 39.5%, 2010년 48.1%로 매년 급증하고 있다. 학부모뿐만 아니다. 대학생을 포함한 젊은이들도 철저히 학벌주의에 물들어 가고 있다. 오찬호박사는‘우리는 차별에 찬성합니다-대한민국 이십대는 어떻게 괴물이 되었는가’에서 대학생을 포함한 20대 젊은이들이 ‘학력위계주의’ 즉 ‘대학서열중독증’에 빠져 있다고 지적한다. 명문대 대학생들은 과거와는 다르게 자신이 명문대를 다닌다는 것을 과시하고, 하위권 대학 학생들을 멸시한다.
학교 수준에 따른 과시와 멸시, 우월감과 열등감의 법칙이 이십 대들을 지배하고 있다는 것이다. 오찬호 박사는“지금 대학생들은 ‘수능점수’의 차이를 ‘모든 능력’의 차이로 확장하는 식의 사고를 갖고 있다. 십 대 시절 단 하루 동안의 학습능력 평가 하나로 평생의 능력이 단정되는 어이없고 불합리한 시스템을 문제시할 눈조차 없는 것이다”라고 말한다.
대학생을 비롯한 젊은이와 기성세대 할 것 없이 많은 사람이 학벌 지상주의에 사로잡혀 있다. 우리의 기업, 정부, 사회 역시 학벌서열주의가 강력하게 작동하고 있다. 대한민국이 학벌 공화국으로 전락한 데에는 미디어가 한몫했다. 김양의 오보 사태에서 바로 보여주듯 학벌 서열주의 폐해를 개선하는 것이 아니라 학벌 지상주의를 교묘하게 심화하고 있다. 신문, 방송 등 미디어에서 반복적으로 재현(representation)하는 대학과 학벌에 대한 이미지와 내러티브는 문제투성이다. 미디어에서 펼쳐내는 대학과 학벌에 대한 지배적 서사와 담론은 철저히 대학서열에 따르는 위계주의에 물들어 있으며 이는 학벌 지상주의를 조장하고 있다. 이로 인해 사회 구성원 전체를 ‘SKY’로 지칭되는 서울대 고려대 연세대 등 소위 서울 명문대 출신부터 서울 소재 대학, 지방 국립대, 지방대, 전문대, 고졸 출신 순으로 서열화하는 문화가 견고하게 자리를 잡았고 이것이 우리 사회와 사회구성원 모두를 병들게 하고 있다.
천재 소녀라고 불린 김정윤 양의 하버드와 스탠포드 대학 동시합격 조작 사건은 학벌 지상주의로 점철된 우리 사회의 또 다른 얼굴이다. 학벌 서열주의가 어린 그녀를 병들게 한 것은 아닐까. 그래서 그 누구도 김정윤양에게 돌을 던질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