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렸을 때 읽었던 무협지 여주인공은 언제나 매력적이었다. 한달음에 수 미터를 날아가는 경공술과 가냘픈 몸으로 휘두르는 검이지만 강건한 무술, 그리고 시선을 사로잡는 미모까지 꼭 한번 만나보고 싶었던 존재였다.
무협지의 실사판이라고 하면 조금 어색하지만, 영화 ‘협녀, 칼의 기억’은 그동안 시도하지 않았던 무협 장르를 실컷 담아낸 팩션 사극이다. 그리고 배우 김고은은 무협물 여주인공의 매력을 물씬 풍긴다. 영화 ‘은교’에서 보여준 앳된 모습이 엊그제 같지만 어느새 20대 여배우의 내공이 느껴진다.
11일 서울 종로구 삼청동의 한 카페에서 이투데이와 인터뷰를 진행한 김고은은 “촬영 내내 온몸이 두들겨 맞은 것 같은 고통 속에 살았다”고 말했다. ‘협녀, 칼의 기억’의 액션신 8할을 책임진 대가였다.
“총 97회차 촬영 중 80회 분량을 촬영했다. 모든 신에 와이어 액션이 있었다. 늘 와이어를 달고 살았다. 처음에는 괜찮은데 1~2시간 지나면 짐을 얹고 있는 것 같은 어려움이 있다. 목 디스크도 왔다. 그 상태에서 무술 동작을 계속 해야 했다. 팔에 ‘알통’이 생겼다.”
검을 통한 액션은 크고 작은 부상을 안겨줬고, 이는 김고은을 포함한 전도연, 이병헌 등 모든 배우가 겪은 고통이었다.
“다 같이 힘들었다. 서로 합을 맞추다가 전도연 선배의 손을 친 적이 있다. 너무 놀라 손을 보려 하는데 ‘괜찮다’고 끝까지 보여주지 않았다. 나중에 보니 밴드를 붙이고 있었다. 다쳤다는 사실을 알면 제가 위축될까봐 배려해줬다. 항상 체력적 한계에 부딪혔고, 액션에 깊은 감정신까지 동반돼 힘들었는데 전도연 선배가 끝까지 기다려줬다. 감사했다.”
‘고생 끝에 낙이 온다’고 했다. 어려운 촬영 현장은 배우의 성장을 돕는다. ‘협녀, 칼의 기억’은 배우 김고은에게 성장 포인트였다.
“‘협녀’를 통해 많은 것을 느꼈다. 극한의 고통 속에서 제가 이 직업을 정말 좋아한다는 사실을 절실하게 느꼈다. 연기하는 것에 대한 감사함을 느낄 수 있었던 현장이었다. 기억에 많이 남을 것 같다.”
김고은의 ‘협녀, 칼의 기억’ 출연은 ‘은교’를 본 박흥식 감독의 제의로 성사됐다.
“무협 장르를 좋아했다. 이야기가 비극적 소재임에도 불구하고 시나리오를 읽으면서 쉽게 동요됐다. 어릴 때부터 중국에서 살아서 무협을 접해왔다. 부연 설명 없이 극이 전개된다는 점이 무협의 매력이다. 무협이라는 장르의 생소함으로 선배 배우들이 출연을 고민했다는 말을 듣고 놀랐다. 저는 무협이 생소하다고 생각하지 못했다.”
무협이어서 도리어 반가웠다고 말한 김고은은 어느새 자신의 필모그래피를 채워나가며 다양한 장르를 소화할 수 있는 20대 여배우로 자리매김했다.
“‘생각 없이 선택하자.’ 아직은 작품을 선택할 때 여러 가지 깊은 생각을 하지 않는다. 이야기가 이해 되고 공감 가면 하고 싶다. 자신에게 생각이 많고 깊어지면 더 두려워진다. ‘은교’라는 작품으로 그 나이에 데뷔할 수 있었던 저는 운이 좋은 배우다. 전도연 선배, 이병헌 선배, 김혜수 선배, 윤여정 선배 등 좋은 선배와 작업할 수 있었던 것도 감사하다.”
최근 몇 년 간 ‘여배우 기근’이라는 우려가 팽배했던 충무로에 김고은의 영향력은 단비와 같다.
“살면서 별로 욕심내는 게 없었다. 유일하게 욕심 부리는 분야가 생겼다. 그래서 더 열심히 한다. 후회하고 싶지 않다. 부족해도 최선을 다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