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지털 카메라의 보급과 함께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질 뻔 했던 일본 후지필름이 새로운 과학기술 시장에서 두각을 나타내고 있어 주목된다.
지난달 20일 후지필름의 고모리 시게타카 최고경영자(CEO) 겸 회장은 일본 경제주간지 ‘닛케이비즈니스’ 표지를 장식해 화제를 모았다. 표지 속 고모리 CEO는 양복 차림이 아닌 흰색 가운에 시험관을 들고 비장한 표정을 짓고 있다. 이는 에볼라 바이러스 치료제와 안티 에이징 로션, 줄기세포 등 최첨단 과학기술에 도전하는 후지필름의 비장한 각오를 상징하는 것이었다.
고모리 CEO는 최근 블룸버그와의 인터뷰에서 앞으로 공격적인 인수·합병(M&A)을 신사업의 성장 동력으로 삼겠다는 포부를 밝혔다.
디지털 카메라 보급으로 2000년 이후 사진용 필름 수요는 급감, 후지필름의 최대 라이벌이었던 미국의 이스트만 코닥은 2012년 파산했다. 후지필름은 코닥의 파산을 거울삼아 핵심 사업을 전면 수정했다. 덕분에 내년 3월 끝나는 2015 회계연도에 사상 최고인 1200억 엔의 순이익을 전망하고 있다. 2016 회계연도까지 순이익 1200억 엔을 달성하기로 한 목표를 조기에 달성하는 셈이다. 지난달 분기 실적 발표 시에는 최대 1000억 엔의 자사주 매입 계획도 발표했다.
고모리 CEO는 2017년 3월말까지 최대 5000억 엔을 M&A에 투입하겠다는 계획이다. 핵심은 헬스케어. 후지필름은 인공적으로 배양한 세포를 사용해 손상된 장기를 복구하는 새로운 치료법인 재생의료에 공을 들이고 있다. 이 일환으로 후지필름은 지난 3월 말 미국 바이오벤처기업인 셀룰러 다이나믹스를 인수했다. 이를 통해 후지필름은 모든 세포로 성장할 수 있는 유도만능줄기세포(iPS세포)를 대량으로 생산할 수 있는 기술을 손에 넣게 됐다.
고모리 CEO는 “아직 성공했다고는 말할 수 없다”며 “상황은 엄청난 속도로 변하고 있어 끊임없이 다각적으로 대비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의 이같은 자세는 하루아침에 생겨난 것이 아니다. 고모리 CEO는 취임한 해인 2003년부터 혁신을 추구했다. 당시는 디지털화의 물결이 필름 수요를 급격히 잠식하고 있던 시기. 고모리 CEO는 사진용 필름에 사용하는 회사의 노하우를 분석, 시장 확대가 전망되는 분야에서 응용 가능성을 모색했다.
그렇게 탄생한 것이 ‘아스타리프트’라는 화장품 브랜드다. 사진의 변색을 막는 ‘아스타키산틴’이라는 황산화 성분을 피부 노화방지 재료로 쓴 것. 필름의 원재료인 콜라겐을 활용해 피부재생을 내세운 아스타리프트는 대성공을 거뒀다.
후지필름의 노하우는 제약분야에서도 응용이 가능했다. 2008년 일본 제약회사 도야마화학을 인수한 후 화학 합성 기술을 접목, 지난해 에볼라 치료제 ‘아비간(Avigan)’을 개발했다. 아비간은 치사율이 높은 병에도 효능을 인정받아 큰 수익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높은 치료제로 주목받고 있다.
회사는 새로운 생명 공학 및 제약 사업이 미래의 성장 동력이 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그렇다고 해서 기존 사업을 등한시하는 것은 아니다. 현재 매출 구성비의 절반 정도를 차지하는 사무실 프린터 및 디지털 복합기 등의 문서 솔루션 부문은 안정적인 수익을 창출하고 있다. 사진과 관련된 제품이나 서비스 등을 전개하는 이미징 솔루션 사업도 지난해에 흑자를 달성했다. 특히 즉석 카메라 ‘체키’는 전세계 곳곳에서 일상화되어 있다.
고모리 CEO는 자신의 역할을 군사령관에 비유하며, “중요한 건 우리의 미래를 걸 만한 담력이 있는지 여부다. 결정은 누구나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라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