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필 겸 미래설계연구원장
그런데 좀 미안하지만 남북 합의문에 대해 할 말이 있다. 세 군데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 내가 합의문 작성에 관여할 수 있었다면 그렇게 쓰지 않거나 그렇게 쓰지 못하게 했을 것이다.
우선 제1항 ‘당국회담을 빠른 시일 내에 개최해 여러 분야의 대화와 협상을 진행한다’는 말부터 적확하지 않다. ‘빠른 시일 내에’는 ‘이른 시일 내에’라고 써야 맞다. 빠르다는 속도에 관한 말이다. 빠르다의 반대는 느리다이다.
글의 취지는 가능한 한 일찍 대화와 협상을 하자는 것이므로 시기에 관한 말인 ‘이르다’를 써야 한다. 이르다의 반대는 늦다다. ‘빠른 시일 내에’ 대신 ‘빨리’라고 쓰는 것은 무방하다. ‘이른 시일 내에’보다 더 강한 표현이 되겠지만.
그 다음 제2항, 군사분계선 비무장지대 남측 지역에서 발생한 지뢰 폭발로 남측 군인들이 부상을 당한 것에 대해 북측이 유감을 표시했다는 대목도 거슬린다. 부상은 몸에 상처를 입은 것을 말한다. 부상(負傷)의 負라는 글자에 이미 지다, 짐지다, 떠맡다, 빚지다, 힘입다, 이런 뜻이 있다. 부상을 입었다, 부상을 당했다는 말은 역전앞과 같이 중복된 표현이다. 그냥 부상했다고 써야 한다. 아니면 알기 쉽게 순 우리말로 다쳤다고 하거나.
언제부턴가 be동사 have동사를 이용한 영어식 표현이 범람하고 있다. “많이 이용해 주십시오”라고 하면 그만인 것을 “많은 이용 있으시기 바랍니다”라고 하고, 회의나 회담, 행사는 무조건 ‘갖고’라고 표현하는 식이다. 우리말에 민감한 북측이 이런 표현에 동의한 게 의아하다.
연예인들이 사귀기 시작하면 무조건 ‘열애 중’이라고 하고, 언론에 알리지 않고 뭘 하면 ‘비밀리에’나 ‘비공개로’가 아니라 ‘극비리에’라고 쓰는 기자들부터가 잘못이다. 언론이 그런다 해도 국가의 중요 문서나 외교 서류를 다루는 사람들은 자구 하나하나에 더 치밀해야 한다.
이것은 다른 이야기이지만 중앙선관위의 대통령 당선증에도 할 말이 있다. 2012년 12월 20일 박근혜 대통령 당선인이 받은 당선증은 이렇게 돼 있다. ‘귀하는 2012년 12월 19일 실시한 제18대 대통령선거에 있어서 당선인으로 결정되었으므로 당선증을 드립니다.’ 그런데 이 경우 ‘실시한’이 맞는가, ‘실시된’이 맞는가. ‘대통령선거에 있어서’도 ‘있어서’라는 말이 굳이 필요한가. ‘대통령선거에서’라고 하면 글자 수도 줄고 훨씬 간명하지 않을까. 김대중 전 대통령 당선증은 생년월일이 적혀 있는 점, ‘이 당선증을 수여합니다’라고 돼 있는 점 말고는 현행 당선증과 똑같다.
그런데 중앙선관위는 ‘증 제1호’라는 국가 중요 문서인 대통령 당선증을 가다듬을 생각이 전혀 없나 보다. 노무현 전 대통령 때 지금처럼 달라지긴 했지만, 형태와 재질, 그리고 문안이 거의 초등학생 표창장 수준으로 보이는 이 당선증을 언제까지 계속 쓸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