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필 겸 미래설계연구원장
‘나치가 공산주의자들을 덮쳤을 때/나는 침묵했지/나는 공산주의자가 아니었으니까.’ 시는 이렇게 시작된다. 나치가 사회민주주의자들을 가두었을 때, 노동조합원들을 덮쳤을 때, 유대인들을 잡으러 왔을 때도 ‘나’는 저항하지 않거나 침묵했다. 시는 ‘그들이 나를 잡으러 왔을 때/나를 위해 저항할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로 끝난다.
올해 여름, 신경숙으로 대변되는 표절 사태가 한국문학을 덮쳤을 때 어떤 이들은 이 해묵은 문제에 정면으로 맞섰지만, 대부분의 문학인들은 침묵하거나 표절자를 두둔하고 본질을 왜곡했다. 백낙청 창비 편집인은 “의도적인 베껴쓰기, 곧 작가의 파렴치한 범죄행위로 단정하는 데는 동의할 수 없다”고 옹호함으로써 비난을 자초했다.
그런데 이번엔 소설가 박민규의 한겨레문학상 수상작 ‘삼미 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과 이상문학상 수상작인 ‘낮잠’도 일부 표절 사실이 드러났다. 문제가 제기되자 작가 자신이 출처를 밝히기에 이르렀다.
신경숙과 박민규는 정도 차이는 있지만 해외에도 작품이 번역된 작가들이다. 한국문학의 프랑스 소개에 앞장서고 있는 프랑스 출판인의 글(‘대산문화’ 가을호)에 의하면 2013년 이후 한국 젊은 작가들의 작품이 계속 번역, 출간되고 있다. 서점 책장에 자리를 차지하기 시작한 김애란 김중혁 편혜영 김연수 정영문 박민규 등의 작품은 문체나 서사의 구조면에서 선배 작가들과 다르다. 그들의 소설은 문학작품 테마의 세계화라는 보다 넓은 문맥으로 읽힐 수 있다는 게 가장 큰 변화라는 것이다.
그런데 표절이라니! 표절은 한국문학의 세계화에 큰 장애가 되는 일이다. 표절 자체도 나쁘지만 ‘한글을 읽을 줄 아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 수 있는’(어느 평론가의 표현) 정도의 베끼기를 인정하지 않고 작가를 감싸는 행태는 한국문학 자체에 대한 실망과 분노로 이어졌다.
여러 문예지 가을호가 표절과 문단권력의 문제점에 관한 기획을 했다. 창비와 함께 신경숙을 떠받쳐온 또 다른 축인 ‘문학동네’ 가을호는 신경숙의 ‘전설’이 일본 소설가 미시마 유키오의 ‘우국’을 표절한 것이라고 명백히 밝혔다. 10월 주주총회에서는 강태형 대표이사와 ‘문학동네’ 1기 편집위원 6명이 물러날 예정이다. 문학동네는 신경숙의 작품을 가장 많이 낸 곳이다.
이런 상황에서 인상 깊은 일은 시인 김사인이 창비가 주관하는 제30회 만해문학상 수상을 사양한 것이다. 그는 예심에 해당하는 시 분야 추천과정에 관여했고, 비상임이긴 하지만 계간 ‘창작과비평’의 편집위원이며 시집 간행 업무에 참여하고 있는 점을 들어 수상을 사양했다.
창비가 제정한 상을 계간 ‘창작과비평’이 나서서 소개하고 창비에서 낸 시집 중에서 상을 주는 구조가 깨졌다는 점에 수상 사양의 의미가 있다. 수상작으로 선정된 ‘어린 당나귀 곁에서’는 창비가 낸 시집이다. 창비는 신경숙 논란을 겪고 있으면서도 문학상 운영의 ‘닫힌 구조’에 대해 아무런 인식과 반성이 없을 만큼 무신경했던 셈이다.
김사인은 좋은 시인이다. 이 시집으로 5월에 제15회 지훈(조지훈)문학상을 받았고, 만해문학상 사양 직전 제7회 임화문학예술상 수상자로 선정됐다. 그는 “간곡한 사양으로써 상의 공정함과 위엄을 지키고, 제 작은 염치도 보전하는 노릇을 삼고자 합니다”라고 말했다. 중요한 말이다. 한국 문학인들이 지금 잃어버렸거나 잊고 있는 것은 바로 예의와 염치다. 김사인은 그걸 알게 해주었다.
자기들끼리 글 쓰고 칭찬하고 길러주는 구조가 온존하는 한, 문제에 대해 침묵하고 ‘용역비평’ ‘주례사비평’으로 문학판을 오도하는 한 한국문학은 장래가 어둡다. 이렇게 거둘 것 없는 한국문학의 가을 들녘에 한 달 후면 또 올해 노벨문학상 발표 소식이 들려온다. 문학인들이 그토록 갈망하는 노벨문학상은 이번에도 한국을 외면할 것 같다. 상을 주고 싶다 해도 표절 논란이 일고 있는 나라의 문학인을 굳이 선정할 이유가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