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영희 국립낙동강생물자원관장
갈대는 우리 주변에서 비교적 흔히 볼 수 있는 식물 중 하나이다. 그러나 울창한 숲속에서 자라는 것이 아니고 반드시 물이 있는 습지나 강가에서 자란다. 그만큼 물과 햇빛을 좋아하고 성질도 강한 식물이다. 갈대의 줄기와 뿌리는 속이 비어 있어 물속에서도 호흡에 전혀 지장이 없다. 그러므로 갈대는 지하부 수분 조건이 잘 유지되는 토양 환경을 좋아한다. 가는 입자의 토양이 퇴적되는 강 하구에 너른 갈대밭이 형성되는 것을 볼 수 있다. 남해안의 순천만과 서해안의 서천 등지에 넓게 펼쳐진 갈대밭이 유명하다.
물결치는 무성한 갈대를 바라보며 예부터 동서양에서 다양한 비유의 대상으로 삼았다. 프랑스 사상가인 파스칼(1623~1662)은 “인간은 생각하는 갈대”라고 그의 저서 ‘팡세’에 나타내었다. 위대한 자연 속에서 인간은 갈대의 줄기와 같이 연약한 존재에 불과하지만 생각할 수 있는 능력을 지님으로써 위대하다는 의미이다. 전래동화 속에서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라고 갈대밭 속에서 소리친 할아버지의 외침을 줏대 없는 갈대가 온 세상에 퍼뜨리고 말았다. 이처럼 갈대는 여리고 변덕이 심해 늘 의리 없는 존재로 표현되고 있다. 배신, 가벼움, 연약함, 변화, 밀고, 지조 없음 등의 부정적인 의미로 표현되는 식물이다. 그러나 이 같은 이미지와는 달리 갈대는 예나 지금이나 쓸모가 많은 식물이다.
우리가 알고 있는 선입관과는 달리 갈대의 줄기는 의외로 견고하고 튼튼하다. 그러므로 예전에는 햇빛을 가리는 발이나 지붕, 삿갓 등을 엮는 데 사용하였다. 특히 이른 봄철에 올라오는 어린 새싹은 당분과 단백질이 풍부해 귀한 식재료로 이용됐다. 일본의 홋카이도 일원 및 중국에서는 노순(蘆筍)이라 해 지금도 식용하고 있다. 여름철 무성하게 자라나는 갈대의 잎과 줄기는 소나 말의 사료로 아주 요긴하였다. 화력은 약하지만 쉽게 얻을 수 있었던 훌륭한 땔감이기도 했다. 지금도 갈대를 원료로 한 펄프는 품질 좋은 최고급 종이를 만드는 데 사용되고 있다.
갈대의 무성한 근경은 땅속에서 좌우 사방으로 그물처럼 견고하게 자라는 특성이 있다. 이 성질을 이용해 최근에는 하천 제방의 침식을 방지하고 다양한 생물의 서식지 조성을 위한 녹화 재료로 많이 이용되고 있다. 특히 뿌리나 줄기에 붙어 있는 각종 미생물의 수질 정화 능력이 연구되면서 더욱 갈대의 중요성이 인식되고 있다. 최근에는 갈대가 식재된 인공섬을 물 위에 띄워 오염물질을 제거하고자 하는 시도도 이뤄지고 있다.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갈대는 연모와 음악의 상징으로 표현된다. 아름다운 요정 시링스(Syrinx)는 험상궂게 생긴 목축의 신 팬(Pan)의 구애를 피해 달아나다 결국 강가에 이르러 갈대로 변해버린다. 시름에 빠진 팬은 그 갈대의 줄기를 꺾어 밀랍으로 이어 붙인 피리를 만들어 불며 그녀를 그리워했다. 아름다운 소리를 내는 이 피리는 팬의 이름을 따서 팬 플루트라고 이름이 붙여졌다. 이런 연유로 서양에서의 갈대는 음악을 상징하는 낭만적인 식물로 여겨지고 있다. 또한 남미 사람들이 흔히 연주하는 팬 플루트는 우리가 알고 있는 갈대가 아닌 훨씬 더 크게 자라는 왕갈대(giant reed)의 줄기로 만든다.
가을철 특유의 경관을 연출하는 갈대와 억새는 자주 혼동하는 식물 중 하나이다. 억새도 역시 똑같은 벼과 식물에 속하며 형태는 물론 개화 시기까지 갈대와 매우 유사하다. 그러나 무엇보다 갈대와 억새는 생태적인 특성이 전혀 다르다. 갈대는 습기가 많은 물가 혹은 습지에서 자라지만 억새는 척박하고 건조한 산지나 비탈면에서 주로 자란다. 또한 갈대는 키가 약 3m 정도까지 높게 자라지만 억새는 상대적으로 키가 작은 1~2m 정도로 자란다. 갈대 이삭은 익으면 갈색을 띠고 깊게 숙이게 되지만 억새는 흰빛을 띠고 바로 서거나 약간 숙여지는 것이 다르다.
전국의 습지나 강 하구에 분포하는 갈대밭은 가을철 우리나라를 찾아오는 철새들의 보금자리로서 매우 중요하다. 갈대는 단순한 식물자원으로서의 가치를 넘어 건전한 생태계를 구성하는 중요한 요소이다. 그러므로 개발과 그릇된 관리 방법에 의해 점차 면적이 줄어들고 있는 전국의 갈대밭을 적절한 생태적 방법으로 보전할 필요가 있다는 것을 역설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