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필 겸 미래설계연구원장
지난 주말 KBS 1TV를 통해 그의 연주를 보는 것은 즐거웠다. 음악을 모르는 사람도 누구나 조성진이 멋있고 예쁘다고 느낄 만했다. ‘조성진 신드롬’을 보면서 네 가지를 생각했다.
인터넷에 ‘조성진’을 치면 가수 의료인 기업인 축구선수 등의 이름이 죽 뜬다. 그런데 내가 아는 조성진(趙誠振)은 없다. 예술의전당 초대 예술감독, 세종문화회관 공연부장으로 일했던 오페라 연출가다. 1980년 당시 ‘아이다’ 연출을 위해 빈에서 일시 귀국했던 33세의 그는 ‘귀공자처럼 생긴 고운 얼굴에 흰 테 안경 너머의 눈동자가 재기에 넘치는 모습’으로 신문에 보도됐다. 지금 조성진에 관한 보도와 비슷하다.
그런데 요즘 활동을 하지 않는다 해도 어쩌면 이렇게도 철저히 잊히는 것일까. 대중문화와 예체능 위주로만 사람을 기억하는 사회가 바람직한 사회인가. 장강의 뒷 물결이 앞 물결을 밀어내고 새 이름이 옛 이름을 덮는다지만, 안타깝고 아쉬운 일이다. 이 세상이 아이돌 세상인가.
두 번째 생각은 견양저육(汧陽豬肉)이라는 말에 관한 것이다. 소동파가 잔치를 하려고 하인을 시켜 돼지고기가 맛있기로 유명한 견양에 가서 돼지 두 마리를 사오게 했다. 그런데 이 녀석이 술에 취해 끌고 오던 돼지를 잃어버리고, 다른 곳에서 구한 돼지를 견양돼지라고 했다. 소동파가 요리를 내놓자 손님들은 이렇게 맛있는 돼지고기는 처음 먹어 본다며 입이 닳도록 칭찬했다. 자리를 파하면서 소동파가 말했다. “지금 드신 건 견양 돼지고기가 아닙니다. 하인이 이웃 고깃간에서 사온 모양입니다.”
소문이 나야 가치를 알아본다. 특히 해외에서 알아주어야 우리는 자신 있게 함께 갈채를 보내며 환호한다. 피아니스트 조성진의 경우가 그렇다는 것은 아니다. 우리가 알아보지 못하는 조성진이 어느 분야든 얼마든지 있을 수 있다.
세 번째는 조성진에게 1점을 준 프랑스 피아니스트 필립 앙트르몽에 관한 생각이다. 그를 비난하는 사람들이 더러 있지만, 그럴 일이 아니다. 그는 조성진의 파리음악원 선배인데 조성진의 선생님과 불편한 관계라는 말도 들린다. 그러나 원천적으로 조성진과 음악적 체질이 다른 것 같다. 그는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나는 극단적으로 솔직한 걸 좋아한다. 모두가 똑같은 방식으로 연주하면 얼마나 지루하겠는가. 나는 페달을 많이 쓰는 걸 극히 싫어한다.”
이게 평점이 낮은 이유인지는 모르겠다. 조성진의 페달 사용에 대해서도 잘 모른다. 하지만 그는 원래 점수가 짠 사람인가 보다. 연주자 10명에 대한 심사위원 17명의 평점을 일삼아 합산해 보니 그가 매긴 점수가 가장 낮았다. 조성진 외의 다른 연주자들에게 1점을 준 심사위원도 많았다. 평점에 대한 논란이 음악에 대한 해석, 연주에 대한 비평의 눈을 넓혀주는 계기가 되면 좋을 것 같다.
마지막 네 번째 생각은 결국 조성진 본인에게로 돌아간다. 그는 피나는 연습과 노력으로 꿈을 이루었다. 쇼팽 콩쿠르 본선을 앞두고는 1년 동안 쇼팽만 죽어라고 쳤다고 한다. 당연히 앞으로도 한결같은 자세로 정진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첼리스트 장한나의 경우를 잘 살피고 본받기를 바란다. 11세 때인 1994년 로스트로포비치 국제 첼로콩쿠르에서 최우수상을 받은 장한나가 음대를 택하지 않고 하버드대 철학과로 진학한 것은 잘 알려진 일이다. “이미 기량으로는 완성됐으니 사유를 정련해야 한다”는 주위의 권고에 따른 선택이었다.
그 이후 장한나는 지휘자로도 활동하고 있는데, 책 이야기를 하는 첼리스트의 모습이 보기 좋다. 조성진도 연주를 하면서 문학 철학 역사에 관한 책을 많이 읽기 바란다. 음악밖에 모르는 음악가는 완성되지 않은 음악가다. 진짜 음악가가 되는 것은 지금부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