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워드로 보는 경제 톡] ‘원조 흙수저’ 정주영의 무한 도전

입력 2015-11-25 16: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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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중공업 해양 엑슨자켓작업 현장에서(출처=아산정주영닷컴)

양복보다 작업복이 더 잘 어울렸습니다. 집무실보다 현장에 더 얼굴을 자주 비췄고요. 구두 뒤축은 늘 닳아 있었고 털실로 짠 조끼는 너덜너덜했습니다. 그 누구보다 돈 많은 왕회장이었지만 ‘재벌’로 불리는 걸 극도로 싫어했습니다. 늘 자신을 ‘부유한 노동자’라고 소개했죠.

성격은 대쪽 같았습니다. 한번 내린 결정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밀어붙였죠. 불가능은 없었습니다. 모든 방법을 동원해 해결책을 찾아냈죠. 때로는 ‘빈대만도 못한 놈’이라며 부하 직원을 채근했습니다. 목표를 향해 달려가는 여정에 걱정과 우려는 모두 변명에 불과했습니다.

사람들의 기억 속에 남아있는 아산(峨山) 정주영 회장의 생전 모습입니다. 그는 요즘 말로 치자면 ‘흙수저’입니다. 강원도 산골짜기 가난한 소작농의 아들로 태어났죠. 학력도 소학교가 전부입니다. 일제강점기 시절엔 모두가 그랬습니다.

부모님을 도와 농사를 짓던 아산은 열여섯 되던 해 소 판 돈 70원을 들고 상경했습니다. 할 수 있는 일은 많지 않았죠. 공사판 허드렛일이 전부였습니다. 그래도 그는 불평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힘들 때마다 자신을 더 채찍질했죠. ‘시련이란 뛰어넘으라고 있는 것이지 걸려 엎어지라고 있는 것이 아니다’라고 생각했으니까요.

인천서 막일꾼으로 품을 팔던 아산은 복흥상회(쌀가게)에 취직했습니다. 그 누구보다 성실하게 일했습니다. 가장 먼저 나와 문을 열었고, 가장 늦게까지 남아있었습니다. ‘운이 나쁘다고 말하는 사람들은 게으른 것’이라고 여겼으니까요. 아산의 성실함을 눈여겨봤던 쌀가게 주인은 그에게 가게를 넘겼습니다. 첫 홀로서기였죠. 그러나 행복은 오랫동안 가지 않았습니다. 조선총독부가 쌀 배급제를 시작하면서 간판을 내려야만 했습니다.

아산은 곧바로 아산서비스공장을 열었지만 이 또한 쉽지 않았습니다. 애써 꾸민 공장엔 불이 났고, 늘 자금난에 시달렸습니다. 조선총독부는 공장 허가를 빌미로 몽니를 부렸죠. 결국 3년 만에 문을 닫았습니다. 두 번의 실패를 거치면서 아산은 아이러니하게도 ‘장사꾼’이 됐습니다. 성공하는 법과 실패하지 않는 법을 모두 터득했죠.

1946년 현대자동차공업사와 현대토건사를 잇달아 설립한 그는 닥치는 대로 일했습니다. 6·25전쟁 때는 미군 숙소를 지어 돈을 벌었고요. 전쟁이 끝난 후에는 한강 인도교 복구공사를 수주하며 회사를 키웠습니다.

▲1984년 2월, 서산 간척사업 최종 물막이 공사 현장에서(출처=아산정주영닷컴)

거북선이 그려진 500원짜리 지폐 한 장을 들고 바클레이즈 은행을 찾아가기도 했죠. 전쟁의 상흔이 지워지지 않은 황량한 땅에는 290일 만에 경부고속도로를 만들어냈습니다. 서부 간척지 공사를 위해 폐선을 가라앉히고, 포드와 헤어져 독자기술로 ‘포니’를 개발했죠. 소 떼 500마리를 이끌고 북한 땅을 밟은 것도 모두 아산이기 때문에 가능했습니다. 그렇게 아산은 한국 경제성장의 산증인으로 남았습니다.

먹고 살기가 점점 더 어려워지는 요즘, 우리가 100년 전 소작농의 아들로 태어난 그를 그리워하는 이유는 간단합니다. 성공에 대한 집념, 포기를 모르는 열정. 헬조선과 수저계급론을 탓하며 자신의 역량에 스스로 한계를 그어 놓는 요즘 사람들에게는 잊힌 단어들입니다. 아산이 살아있었더라면 분명 한마디 했겠지요.

“이봐! 해봤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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