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 박정림·수협 강신숙 부행장 등 곧 임기만료…부행장이상 ‘全無’ 기로
국내 은행권 여성들이 경험하는 유리천장의 심각성을 상징하는 가장 명징한 수치다.
무슨 얘기인가 하고 의문이 드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지난 2013년 말 여성 대통령 탄생과 함께 국내 은행권에 첫 여성 행장도 탄생했다. 대통령 당선 전이긴 하지만 중앙은행인 한국은행에도 여성이 처음으로 부총재보 자리에 올랐다. 그리고 여성 임원(상무·전무·본부장·부행장)들이 이전에 비해 조금씩 늘었던 것도 사실이니 말이다.
그러나 여풍(女風)이 부는가 했지만 잠깐 사이에 멈췄다. 올해에 이어 내년 초까지 임기가 끝났거나 끝나는 여성 부행장 자리가 더 유지되지 않을 것이란 우려가 현실화되고 있다. 여풍이 한 줄기도 닿지 않았던 곳은 여전히 음지로 존재하고 있다. 여성 대통령 반짝 특수(?)는 끝났다는 얘기가 나온다.
◇“여성 대통령 특수는 끝났다”=3년 전 IBK기업은행 권선주 부행장을 제외하곤 국내 은행권에 여성 부행장은 ‘0명’이었다. 부행장에 오르려면 그 아래 상무나 전무, 본부장급 여성 후보들이 많아야 하는데 별로 없었다. 여성이 은행에서 비중이 낮지는 않지만 지점만이 아니라 본부에서까지 다양한 업무를 체험하며 경력을 다지도록 배려된 경우가 별로 없는 탓이기도 하다.
당시 IBK기업은행 행장 자리를 둘러싼 경쟁이 치열했다. 설립 이후 첫 내부 승진자였던 조준희 당시 행장(현 YTN 대표)의 임기 만료를 앞두고 조준희 행장이 연임할 것이냐, 아니면 관례(?)대로 모피아(옛 재무부 출시 관료) 인사들이 낙하산으로 내려올 것인가를 두고서 갑론을박이 오갔다. 권선주 당시 부행장의 승진을 점친 이는 거의 없었다. 금융위원회 산하 금융공공기관인 IBK기업은행의 행장은 금융위원장 제청을 받아 대통령이 최종 임명하게 되는데 이때 천거된 권선주 부행장의 35년 노력이 이 과정에서 드디어 빛을 보게 됐다. 권선주 행장은 현재 1년 더 임기를 남겨놓고 있다. 그런데 총선 차출 얘기가 그치지 않는다. 만약 권선주 행장이 총선에 나간다면 여성 행장 숫자는 또 ‘0’이 되고 만다. IBK기업은행 두 번째 여성 부행장이라 ‘리틀 권선주’로 불리는 김성미 부행장과 오숙희 본부장, 그리고 최현숙 본부장만 남는다.
우리은행에서는 여성 부행장이 없어졌다. 이달 초 단행된 우리은행 임원 인사에선 올해 말 임기 만료인 부행장 5명 가운데 2명만 자리를 지켰고 여성인 김옥정 부행장은 떠나게 됐다. 34년 근속하며 외환과 영업, 자산관리(WM) 등의 다양한 분야를 거쳤고 WM사업단 상무가 된 지 1년 만에 부행장으로 발탁돼 화제가 됐던 김옥정 부행장이었다. 여성 임원은 이재숙, 이진희, 송한영, 정종숙 본부장 등 4명만 남는다.
외환은행과 하나은행이 합치면서 여성 임원이 줄어든 것도 눈에 띈다. 외환은행 출신의 최동숙 전무가 올해 초 물러났고, 하나은행 출신의 김덕자 전무도 퇴임했다. 통합 KEB하나은행에는 천경미 전무와 이경향 본부장, 정현주 본부장만 남아 있다.
인사를 앞둔 여성 부행장들로는 박정림 국민은행 부행장과 내년 4월 연임 여부가 가려질 강신숙 수협 부행장이 있다. 박정림 부행장은 지난해 말 인사폭풍 속에서 절반 이상의 부행장들이 짐을 쌌을 때에도 자리를 지켰지만 어떤 결정이 내려질지는 알 수 없다.
강신숙 수협 부행장은 “내가 연임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지속적으로 여성 부행장 등 여성 임원 자리가 유지되는 것이 중요하다”면서 “실력의 차이는 거의 없는데 여성을 더 키워주는 분위기가 은행권에 여전히 부족한 것이 사실”이라며 아쉬워했다.
◇금융공공기관은 여성 인재 ‘블랙홀’=한국산업은행과 한국수출입은행에서는 아직까지 한 번도 여성 임원이 배출되지 않았다. 여성 임원 ‘0명’이란 얘기다. 산업은행에서 정년까지 일했고 수장을 맡는 지점마다 확실한 성과를 보여주며 화제가 됐던 김세진 전 부장. 남성 동기, 후배들이 줄줄이 승진하는 가운데 마음고생도 많았지만 결국 임원을 달지 못하고 산업은행을 떠났다.
NH농협금융지주(옛 농협중앙회)도 마찬가지다. 지난 4월 윤명희 새누리당 의원은 농협 청문회에서 최원병 농협중앙회 회장에게 “작년에도 지적했는데 여전히 농협 내 여성 임원은 전무하다”고 날카롭게 지적했다. 윤명희 의원실 자료에 따르면 농협 내 여성 임원은 고사하고 부장급 간부도 농협은행은 1.5%가 고작이었다. 정규직 여성 직원 비중은 9.3%에 불과하고 비정규직 여성 직원만 77%에 달한다.
“작년에도 지적했는데”라는 윤 의원의 말은 의미심장하다. 작년 농협중앙회 회장은 현 임종룡 금융위원장이기 때문이다. 지난 3월 임종룡 당시 금융위원장 후보자 역시 청문회에서 김을동 새누리당 의원에게 비수 같은 질문을 받았다. 김을동 의원은 금융권 여성 인재 활용이 더디다는 점을 지적하고 “여성의 승진에 제약이 있다면 어떻게 하겠냐”고 물었다. 임종룡 당시 금융위원장 후보자는 ‘앞으로’를 봐 달라는 내용으로 답했다. 지금까지 금융위 산하 공공기관(산업은행과 IBK기업은행 등 8개)의 여성인력 비중이 매우 낮지만 농협에서도 여성 인재들이 중간 간부층까지 올라오고 있고 그 위를 막는 제약이 혹시나 있다면 없애겠다고 했다.
금융감독원에서는 오순명 부원장보, 김유미 선임국장이 활약하고 있다. 또한 오랜 금융계 경력을 바탕으로 지난 2003년 여성금융인네트워크(여금넷)를 만들어 여성 금융인들의 돈독한 연대를 꾀하고 있는 김상경 한국국제금융연수원 원장 겸 여금넷 회장 등이 여성이 차별받지 않고 제대로 능력을 인정받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해 힘을 아끼지 않는 대표적인 여성들이다.
김상경 여금넷 회장은 “여성 대통령 탄생과 함께 은행권에 잠시나마 성차별을 하지 않는다는 걸 보여주는, 이른바 토크니즘(Tokenism)이 나타났지만 정부나 사회가 더 이상 여성에 대한 관심을 별로 갖지 않는다고 여겨지자 그나마 있던 여성 임원들도 자리를 떠나게 되어 안타깝다”면서 “계속해서 여성들을 개인영업에만 배치한다든지 하면 임원 승진에 불리할 수밖에 없으니 다양한 경험의 기회를 주어야 하며, 여성 본인들도 자신감과 조직과 비전에 대한 큰 시각을 갖고 훈련하는 것이 필요하다. 임원 추천 때마다 매번 여성이 후보가 되도록 하고 사외이사 비중의 3분의 1도 여성으로 할당하는 등의 노력을 해야 양성평등이 실현될 수 있을 것이다”고 힘줘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