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한 어둠이 조금씩 걷힌다. 영하 10도의 새벽 칼바람이 얼굴을 후빈다. 수많은 사람들이 출근을 위해 지하철역으로 발걸음을 옮긴다. 지하철역 주변에선 시린 발을 동동 구르며 일당 인부를 태우는 승합차를 애타게 기다리는 사람이 있다. “12월이라 일이 없어요. 그런데 안 나올 수 없어요. 재수 좋으면 하루 일당 10만 원 정도 챙길 수 있으니까요. 오늘은 공쳤지만, 자식들 생각해 내일도 나와야지요. 막막하지만 살아가야지요.” 2015년 12월 28일 오전 5시 50분 서울 남구로역 인력시장에서 만난 박 모 씨(48)다.
힘들지만 포기하지 않겠다고 했다. 막막하지만 살아가야 한다고 했다. 두 사람의 말이 귓가를 맴도는 사이 2016년 새해는 밝았다.
2016년 병신년(丙申年)이다. 병신년의 1월 1일 아침이 밝았지만, 사람들은 그리고 우리 사회는 어둡기만 하다. 그 암영의 진원은 광범하다. 정부와 정치권의 무능과 부패, 권력과 재력을 가진 자들의 탐욕, 사람보다 돈이 우선인 사회, 강자의 부와 행복을 위해 약자의 빈곤과 비참을 아무렇지 않게 강제하는 탈취 자본주의의 심화, 반성과 성찰 없는 무자비한 신자유주의의 횡행 등 열거하기도 힘들다.
이러한 진원으로 인해 꿈으로 가득 차야 할 청년들은 하나둘씩 포기하며 N포 세대로 전락한다. 한창 일할 중년의 가장들은 구조조정의 칼바람에 내몰리며 차가운 길거리를 헤매고 있다. 인건비조차 건지지 못한 농민들은 자식 같은 농산물을 땅에 묻으며 통곡하고, 기업의 슈퍼 갑질로 동네 자영업자는 문을 닫고 감당 못 할 빚더미에 절망한다.
또한, 1% 강자의 탐욕과 99% 약자의 분노로 대변되는 1대 99의 양극화의 무한 질주 속에 20대 여성 언어치료사 황 모 씨(29)는 월세도 내지 못한 채 영양실조 상태로 숨진 지 10여 일이 지난 뒤 서울 관악구 신림동 한 고시원에서 싸늘한 시신으로 발견됐다. “사는 게 너무 힘들다. 화장해서 뿌려 달라”는 유서를 남기고 경기 부천의 한 아파트에서 29세, 31세, 33세의 세 자매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생존을 결정하는 것은 수저 색깔”이라는 글을 남기고 서울대 학생(19)이 자살했다. 이 비극적 사건들은 2015년의 특수한 사건이 아니다. 절망을 넘어 삶마저 포기하는 수많은 사건은 더는 낯선 모습이 아니다.
하지만 다시 희망을 노래할 수밖에 없다. 고통과 절망에서 삶을 지탱해줄 수 있는 유일한 힘이 희망이고 사람이 유일한 희망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2016년 병신년 1월 1일 아침 가슴으로 읽는다. ‘뿌리 없이 흔들리는 부평초 잎이라도/ 물 고이면 꽃은 피거니/ 이 세상 어디서나 개울은 흐르고/ 이 세상 어디서나 등불은 켜지듯/ 가자 고통이여 살 맞대고 가자/ 외롭기로 작정하면 어디든 못 가랴/ 가기로 목숨 걸면 지는 해가 문제랴’라는 고정희의 시(‘상한 영혼을 위하여’)를.
그리고 힘겨워하는 이 땅의 사람들에게 마음으로 전하고 싶다. ‘희망찬 사람은/ 그 자신이 희망이다/ 길 찾는 사람은/ 그 자신이 새 길이다/참 좋은 사람은/그 자신이 이미 좋은 세상이다/ 사람 속에 들어 있다/ 사람에서 시작된다/ 다시/ 사람만이 희망이다’라는 박노해의 시(‘사람만이 희망이다’)를.
또한, 기원한다. 노량진에서 만난 취업준비생 김 모 씨가 취직해 첫 월급으로 어머니에게 빨간 내복을 선물하기를, 그리고 남구로역 인력시장에서 만난 박 모 씨가 매일 일을 얻어 자식들에게 맛있는 것 배불리 먹이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