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예인 스폰서 문제와 함께 또 다른 연예계 문제는 드라마나 영화, 프로그램 출연을 둘러싼 캐스팅의 문제다.
“저는 나약하고 힘없는 신인 배우입니다. 이 고통에서 벗어나고 싶습니다.” 신인 연기자 장자연이 지난 2009년 3월 7일 술 접대와 성 상납을 강요당했다는 충격적인 내용이 담긴 문건을 남기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성을 팔아 배역을 얻는 배우가 있다. 내가 관여할 문제는 아니지만, 브라운관 속의 그녀를 부러워하며 나와 내 매니저를 질책하는 엄마. 완전 미움.” 배우 장경아가 자신의 트위터에 올린 글이다. “성 상납과 스폰서 제의를 받았지만 거절했다. 기획사 대표의 술자리 초대도 거절했지만, 워낙 생활이 고단해 고민하기도 했다.” 중견 연기자 김부선이 방송에서 한 말이다.
조모(40) 씨는 2013년 5월부터 2015년 1월까지 영화에 출연시켜주겠다며 A모 양을 수차례 성폭행한 혐의로 징역 8년을 선고받았다. “연기자가 되고 아이돌을 꿈꾸는 지망생과 연습생이라면 대부분 성 상납 문제를 고민합니다. 특히 방송이나 작품 출연 과정에서 성 상납 제의가 많다는 소문이 있어 걱정되지요.” 취재현장에서 만난 연예인 지망생 상당수의 우려다.
이처럼 드라마, 영화, 광고 출연 기회를 잡기 위해 제작자, 투자자, 연출자 등 관계자들에게 성을 상납하는 연예인의 문제가 종종 발생해 대중에게 큰 충격을 주고 있다. 영화, 드라마, 광고 출연을 둘러싸고 성 상납 제의를 받았다는 연예인의 폭로가 끊이지 않는다. 또한, 출연을 미끼로 신인이나 연예인 지망생을 성폭행하거나 금품을 갈취하는 사건도 지속해서 발생한다.
장자연 사건 직후 국가인권위원회가 여성 연기자 111명과 연예인 지망생 240명, 연예산업 관계자 11명 등을 심층 면접 조사한 결과에 따르면 성희롱이나 성폭행과 같은 성적 피해가 많은 것으로 드러났다.
여성 연기자의 45.3%가 술 시중을 들라는 요구를 받은 경험이 있다고 답했고, 60.2%는 방송 관계자나 사회 유력 인사에 대한 성 접대 제의를 받은 것으로 조사됐다. 그리고 조사대상 여자 연예인의 31.5%는 가슴과 엉덩이, 다리 등 신체 일부를 만지는 행위 등 피해를 봤다고 밝혔다. 21.5%는 성관계를 요구받거나, 6.5%는 성폭행 등 명백한 범죄 피해를 봤다고 답했다.
작품 출연을 둘러싸고 발생하는 이 같은 고질적 병폐는 그 역사가 깊다. 그리고 이 같은 문제는 우리 연예계만의 문제가 아니다. 외국의 경우도 작품 출연을 둘러싼 성 상납 같은 문제가 적지 않게 발생하고 있다.
미국의 ‘캐스팅 카우치(Casting Couch)’라는 용어는 출연을 의미하는 캐스팅과 소파를 뜻하는 카우치의 합성어로 영화감독, PD, 작가, 매니저, 투자자, 제작자에게 잠자리를 제공하고 배역을 받는 것과 성 상납고 영화, 드라마, 프로그램 등에 출연하는 연예인들을 지칭한다.
일본에서는 연예인이 성 상납 하고 배역을 따내는 것을 ‘베개 영업’이라고 지칭하며 그런 연예인을 ‘베개 영업 연예인’으로 명명한다.
중국과 대만 역시 작품 출연을 둘러싼 연예인 성상납 사건들이 종종 발생하는데 이를 ‘성 조공(性朝貢)’이라고 한다. 중국 언론들은 일부 중국 연예인이 강제적 성 조공보다 자발적 성 조공을 하는 경우가 있다고 질타하고, 대만 매체에서는 일부 연예인의 강제적 성 조공과 자발적 성 조공이 동시에 이뤄진다고 비판하기도 한다.
작품 출연을 둘러싼 성 상납 등은 명백한 범죄이자 연예계의 대표적인 병폐인데 왜 끊이지 않고 발생하는 것일까.
연예계 인력의 수요와 공급의 엄청난 불균형과 불투명한 캐스팅 관행이 가장 큰 원인이다. 엠넷 오디션 프로그램 ‘슈퍼스타K’에 참가 신청자가 200만 명에 달할 정도로 대한민국은 연예인 지망생 공화국이 된 지 오래다. 연예인 지망생만 100만 명에 이른다. 매년 1만여 명에 달하는 대학의 방송, 연극, 영화 관련학과 졸업생이 쏟아져 나온다. 연기학원이나 연예기획사를 찾는 연예인 지망생도 부지기수다. 연예인 지망생과 연예인은 급증하고 있지만, 이들이 활동할 수 있는 방송, 영화, 무대, 광고 등 작품 수는 매우 한정돼 있다.
한국연예인노조가 연기자 노조원 403명을 대상으로 벌인 조사에서 40%에 달하는 연예인들이 한해에 단 한 번도 드라마나 영화에 출연하지 못한 것으로 나타났다. 대한가수협회 김원찬 전 사무국장은 “우리나라에 가수로 활동하는 사람이 2만여 명에 달한다. 이중 노래만으로 생계를 해결하는 사람은 1%도 안 된다”고 설명한다.
물론 희소하고 경쟁력 높은 스타의 경우에는 작품 출연 여부에서부터 출연료에 이르기까지 출연과 관련된 것들을 공급자인 스타가 결정하는 공급자 중심시장이다. 하지만 신인과 무명 연예인, 중견 연예인, 지망생의 경우는 PD와 감독, 투자자, 제작자 등 수요자가 출연 여부에서부터 출연료까지 결정하는 수요자 중심시장 성격을 띤다. 연예인 공급자가 수요 작품의 인원에 비해 엄청나다 보니 성 상납이라도 해서 출연 기회를 잡자는 생각을 하는 사람이 생겨난다.
여기에 공정하고 투명한 캐스팅 오디션 시스템이 구축되지 못한 후진적인 출연 시스템도 한국 연예계의 성 상납 문제를 근절하지 못하는 원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드라마나 영화 제작이 결정되면 출연진을 결정하기 위해 대부분 오디션이나 캐스팅 상담을 실시 하지만 이 과정이 투명하고 공정하게 진행되지 않는 경우가 종종 있다. 일부 PD와 감독, 제작자, 투자자, 연예기획사 대표가 연예인의 작품 출연 결정 과정에서 갑 위치의 권력을 부당하게 휘두르며 성 상납을 요구하기도 한다.
한국대중문화예술인복지회가 펴낸 ‘출연제안서’에 따르면 연기자들 대부분은 연출자의 관계와 매니저의 로비에 의해 드라마 캐스팅이 좌우된다고 인식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연기자 301명을 대상으로 작품 캐스팅에 영향을 미치는 것이 무엇이냐를 묻는 설문조사에서 조사대상 연기자의 41.2%가 ‘PD와의 관계에 의해’라고 했고 27.6%가 ‘매니저의 로비로’라고 답했다. 실력(연기력)이 캐스팅에 영향을 미친다고 답한 연기자는 11.6%에 불과했다. 이밖에 캐스팅에 영향을 미치는 것으로 금전(5.6%), 고위간부와의 관계(3.0%), 작가와의 관계(2.7%), 외부인사와의 관계(2.3%), 기타(2.7%) 순이었다.
출연 여부 결정 과정에서 성 상납 제의를 받을 당시 출연에 대한 불이익 등을 우려해 신고 등 철저한 대응을 하지 않고 있다가 시간이 흐른 뒤 “성 상납 제의를 받았다”는 식의 눈길 끌기용 폭로로 일관하는 일부 연예인의 문제 있는 태도도 출연을 둘러싼 문제를 뿌리 뽑는 데 한계로 작용하고 있다. 여기에 연예기획사에 관련된 법적, 제도적 후진성 역시 연예계의 고질적 병폐인 캐스팅을 둘러싼 성 상납 문제를 근절하지 못하는 원인이다.
성 상납 등 자신에게 가해지는 엄청난 고통을 견디다 못해 스스로 목숨을 끊은 장자연 같은 연예인이 더는 나오지 않고 한국 대중문화가 발전하기 위해서는 출연을 둘러싼 문제들이 반드시 개선돼야 한다.
출연을 둘러싼 갖은 병폐를 근절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투명하고 공정한 캐스팅 시스템 구축이 절실하다. 영국 BBC의 경우, 드라마가 기획되면 기획서를 인터넷 등에 공지하고 오디션에 참가할 연기자 신청을 받는다. 1차 연기 모습을 담은 테이프로 일정 수의 연기자를 뽑고 그다음 드라마 관계자가 모여 오디션을 실시해 캐릭터에 맞고 드라마에 필요한 연기자를 선발하는 시스템이 구축돼 있다. 이 과정이 모두 인터넷에 공개해 캐스팅 작업을 공정하고 투명하게 진행한다. 이 같은 방식으로 드라마에 맞는 최적의 연기자를 선발하고 이를 통해 드라마의 완성도를 높이는 동시에 실력 있는 연기자의 인적 인프라를 튼실하게 만든다.
투명하고 공정한 캐스팅 시스템 구축과 함께 연예기획사를 비롯한 연예산업 전반에 대한 법과 제도의 보완, 불법적 사건에 대한 철저한 수사와 범법자에 대한 엄격한 처벌, 연예인 과잉 공급의 문제에 대한 개선, 연예인과 지망생들에 대한 체계적인 교육실시, 일부 연예인과 연예계 종사자, 연예인 수요자의 잘못된 인식 전환 등이 뒤따라야 만이 출연을 둘러싼 범죄나 병폐가 완전히 근절될 수 있다.
이러한 작업이 철저하게 진행돼야 만이 ‘연예인’이라는 단어의 연관검색어로 ‘성폭행’ ‘성추행’ ‘성 상납’이라는 용어가 뜨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저는 나약하고 힘없는 신인 배우입니다. 이 고통에서 벗어나고 싶습니다”라고 절규하며 자살한 장자연 같은 비극이 다시 발생하지 않을 것이다. (이글은 ‘예향’ 3월호에 기고한 글을 일부 수정한 것임을 알려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