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오키나와(沖縄) 미나토가와(港川)를 떠난 지 한 시간쯤 된 것 같다. 차창 밖 오른쪽으로 펼쳐졌던 바다 풍경이 어느새 왼쪽에서 푸른빛을 품어내기 시작했다. 참 아름다운 풍경이다. 덕분에 이른 아침부터 시작된 고속도로 주행에도 피로감을 느끼지 못했다.
맑고 푸른빛의 바다는 동지나해(東支那海)다. 자동차로 해안도로를 달리다보면 오른쪽에 그리 크지 않은 골프장 입구가 눈에 들어오는데 이곳이 바로 1970년 개장한 오키나와 제2호(미군 골프장 제외) 골프장 쥬라 오차드 골프클럽이다. 미유키 호텔 바로 맞은편이다.
골프장 입구를 통과하면 곧바로 넓지 않은 주차장으로 이어진다. 기자가 골프장에 도착한 건 오전 8시가 조금 넘은 시간이었다. 내비게이션 하나에 의지해야 했던 만큼 서둘러 숙소를 나왔지만 예상보다 훨씬 이른 시간에 골프장에 도착했다. 차에서 내려 주변을 둘러보니 아름다운 동지나해를 따라 건설된 호텔들이 하나 둘 눈에 들어왔다. 세계적인 휴양지라는 명성에 어울리는 평온한 마을이었다.
골프장에서 가장 먼저 찾은 곳은 클럽하우스 2층 카페다. 코스에 나가기 전에 커피 한잔의 여유를 느껴보고 싶었다. 흥미로운 건 카페 테이블에 따라 전혀 다른 창밖 풍경이 펼쳐진다는 점이다. 기자는 동지나해 비경을 선택했다. 3월의 아침햇살에 깨어난 동지나해가 특유의 새파란 속살을 드러냈다. 여느 바닷물과 다를 것이 없어 보였다. 하지만 오후가 되면 새파란 바닷물이 조금씩 에메랄드빛으로 변한단다.
전동카드를 대여 받고 코스로 나간 건 오전 9시가 조금 넘은 시간이었다. 쥬라 오차드 골프클럽은 아웃코스에서 언덕을 따라 올라가고 인코스에서 동지나해를 마주하며 내려오도록 설계돼 있다. 그렇다면 9번홀(파4)을 턴할 때쯤이면 동지나해의 새파란 바닷물이 에메랄드빛으로 변해있을 거란 즐거운 상상을 해보며 코스로 나섰다.
쥬라 오차드 골프클럽의 ‘쥬라’는 한자 아름다울 ‘미(美)’에 일본 히라가나 ‘라(ら)’를 붙여 쓰며, ‘아름다운’이란 뜻을 지녔단다. 아마도 동지나해의 비경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 아닐까 생각된다.
천혜 비경을 자랑하는 코스지만 아쉬운 점도 있었다. 오래된 코스인 만큼 전체적으로 전장이 짧고 페어웨이가 좁았다. 호쾌한 장타를 뽐낼 수 있는 뻥 뚫린 코스를 기대한다면 실망할 일이다. 가장 긴 홀이 495야드(2번ㆍ레귤러 티 기준)로 500야드를 넘지 않을 정도다. 그나마 매 홀 아기자기한 레이아웃과 동자나해의 비경이 그것을 만회하는 듯하다.
현재 오키나와엔 16개의 민간 골프장이 있는데 위치에 따라 미묘한 특색이 있다. 기자가 일주일 동안 시간을 보낸 난조시(南城市) 근처는 일본여자프로골프(JLPGA) 투어 시즌 개막전이 열린 류큐골프클럽을 비롯해 특급 골프장이 많다. 나하(那覇)항공에서 20분대 거리인 만큼 그린피도 제법 비싸다. 하지만 공항에서 북쪽으로 멀리 올라갈수록 경치는 아름답고 그린피는 저렴하다. 쥬라 오차드 골프클럽도 그 중 하나다.
나하공항에서 자동차(고속도로)를 이용하면 이 골프장까지 약 1시간 10분 정도 소요된다. 티타임은 2부제(오전 7시~8시 59분ㆍ정오~오후 1시 45분)로 캐디는 선택할 수 있다. 캐디 없이 셀프 플레이를 할 경우 그린피는 평일 1만3245엔(약 14만원), 주말은 1만8645엔(약 19만원, 전동카트ㆍ식사ㆍ소비세 포함)이다.
오키나와 골프장에 한 가지 공통점이 있다면 강한 바람과 변덕스러운 날씨다. 특히나 쥬라 오차드 골프클럽은 임지나해를 눈앞에서 감상하는 호사의 대가를 충분히 치러야 한다. 짧고 좁은 코스에 강한 바람까지 더해지면 그날 스코어는 처음부터 기대하지 않는 것이 좋다.
골프장 내에는 4개의 그늘집이 있다. 그중 두 곳에선 매점을 운영하고 있었다. 오키나와에서만 맛볼 수 있는 먹을거리를 기대하며 매점 문을 열었다. 식사대용으론 포크타마고(210엔)와 핫도그(280엔)가 있었다. 거기에 삶은 달걀(110엔), 찹쌀떡(150엔) 등이 있다. 간식거리론 소시지와 캐러멜도 있었다. 오키나와 어디에서도 맛볼 수 있는 오키나와 소바(오키나와식 메밀국수)는 없었다.
그늘집 여성 점원에게 ‘오키나와에서만 맛볼 수 있는 음식은 없냐’고 물었다. 그러자 오키나와식 돼지족발인 돈소쿠(鈍足)를 추천했다. 한국에서 먹던 족발을 상상하며 망설임 없이 주문했다. 점원은 준비된 돈소쿠를 기자 앞에 내놓았다. 장시간 삶은 것으로 보이지만 돼지 족 원형은 그대로 유지하고 있었다. 군데군데 긴 돼지 털도 눈에 들어왔지만 크게 위화감은 없었다. 맛은 한국 족발과는 완전히 달랐다. 입에서 살살 녹을 만큼 부드러운 식감이 특징이다. 기자는 점원 앞에서 ‘우마이(맛있다)’를 연발했지만 진심은 아니었다.
다른 음식도 추천받았다. 오키나와식 오니기리(주먹밥)인 포크타마고다. 사실 오키나와를 여행하다보면 흔히 볼 수 있는 음식이다. 점원은 본토 오니기리와는 완전히 다를 거라며 준비된 포크타마고를 내놨다. 흰 쌀밥 위에 큼직한 달걀부침과 스팸을 얹었고, 그것을 김으로 감싼 것이 포크타마고다. 미관만으론 맛을 기대하긴 어려웠지만 제법 깔끔한 맛이었다.
출출한 배를 채우고 다시 코스로 나오니 동지나해가 눈에 들어왔다. 출발 때만 해도 파란 빛을 띠던 바닷물이 해변을 중심으로 조금씩 에메랄드빛 옷으로 갈아입고 있었다. 수줍은 듯 아주 천천히 숨은 속살을 드러내는 듯했다.
코스는 이제 클라이맥스만을 남겨뒀다. 동지나해를 마주하며 내리막 코스를 라운드 하다보면 동지나해가 눈앞에서 에메랄드빛 비경을 연출한다. 변화무쌍한 코스 레이아웃에 인코스에서 진가를 드러내는 동지나해가 쥬라 오차드 골프클럽의 백미다. 비록 짧고 좁지만 세심한 곳까지 관리하고 조성한 일본 골프장답다는 생각이 들었다.
천혜 비경 속 류큐왕국(琉球王国ㆍ1429~1879)의 슬픈 역사를 간직한 오키나와에서의 일정은 이것으로 끝을 맺었다. 일본 본토와는 전혀 다른 코스와 사람, 그리고 먹을거리 하나 하나가 기자의 머릿속에서 오래도록 맴돌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