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계 5위의 롯데그룹이 사정당국의 강도 높은 비자금 수사가 시작돼 창사 70여년만에 최대 위기를 맞았지만 이 혼란의 와중에도 신동주ㆍ동빈 형제가 또 다시 표 대결을 벌이며 '경영권 분쟁'을 본격화하고 있다.
역대 정권마다 갖은 특혜 논란과 비리 의혹에도 꿋꿋했던 롯데그룹이 그룹 전반에서 사정(司正) 대상에 오른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지난 10일 진행된 압수수색에만 검찰과 수사관 등 240여명이 투입됐고, 신동빈 회장의 자택까지 압수수색하는 등 이례적인 '고강도' 수사가 펼쳐지고 있다. 꼬박 16시간 가량의 사상 최대규모의 압수수색을 받은 이후 롯데그룹 재무 담당자 등에 대한 줄소환이 이뤄지고 있다. 이인원 부회장과 황각규 정책본부 운영실장 등 주요 간부들에 대해 출국금지조치도 취해졌다.
곳곳에서 창사 이래 최대 위기라는 소리가 흘러나오고 있다. 롯데그룹이 흔들리는 작금의 사태는 신동주ㆍ동빈 형제의 경영권 분쟁이 단초가 됐다. 국적ㆍ국부 유출 논란으로 국민들의 분노가 겁잡을 수 없이 커진 상황에서도 이들은 이달 말 또 3번째 표대결을 치를 예정이다.
신동빈 롯데그룹 회장이 해외 출장으로 자리를 비운 상황에서 신동주 전 일본 롯데홀딩스 부회장은 이달 말 열리는 정기 주주총회 안건으로 신 회장의 이사직 해임안을 상정해달라고 요구한 상태다. 똘똘 뭉쳐 위기를 함께 극복하는 것이 아니라 또 다시 피 튀기는 경영권 분쟁을 하겠다는 의지다.
◇신동주 '신동빈 해임안 상정 요구'… '핏줄' 보다 '회사 경영권'= 12일 롯데그룹에 따르면 이달 말 일본 도쿄 롯데홀딩스 본사에서는 정기 주주총회가 열릴 예정이다.
이 주총에 앞서 신 전 부회장은 신 회장과 쓰쿠다 다카유키(佃孝之) 사장을 롯데홀딩스 이사직에서 해임하는 안건을 주총에 상정해달라고 롯데홀딩스에 공식 요구한 것으로 알려졌다.
실제 안건 상장 여부는 롯데홀딩스 이사회에서 결정되는데, 거부할 명분과 이유가 뚜렷하지 않은 만큼 정식 안건으로 채택돼 주총 당일 표 대결이 이뤄질 것으로 예상된다.
작년 8월 홀딩스 임시 주총에서 신 회장이 제안한 '사외이사 선임' 건, '법과 원칙에 따르는 경영에 관한 방침' 건이 신 전 부회장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15분 만에 모두 원안대로 통과됐다.
올해 3월 6일 주총에서는 신 전 부회장이 제기한 자신의 이사 복귀와 신동빈 회장·다카유키 사장 이사 해임 건이 30분 만에 모두 부결됐다.
특히 신동주 전 부회장은 3월 주총을 앞두고 승패를 좌우할 종업원 지주회(지분 27.8%)에 "홀딩스 상장을 전제로 지주회원 1인당 25억 원 상당의 지분을 배분하고 개인이 팔 수 있게 해주겠다"는 파격 제안까지 내놓았지만, 결국 판세를 뒤집지 못했다.
이후 롯데그룹은 '경영권 분쟁 종식'을 선언하며 '신동빈의 한ㆍ일 롯데 원톱 체제' 시대를 본격화하겠다고 밝혔다.
앞서 두 차례의 주총 표 대결에서는 모두 신 회장이 압승한 만큼 롯데그룹은 이번 표 대결 역시 무의미하다고 판단하고 있다.
문제는 신 전 부회장의 반격이 단순히 이번 한번의 표 대결에서 그치지 않을 것이란 점이다. 신 회장과 호텔롯데·롯데면세점·롯데마트 등 그룹 주요 계열사들이 비자금, 면세점 입점 로비, 가습기 살균제 인명피해 등으로 동시에 수사를 받는 등 큰 위기에 직면한 만큼, 신 전 부회장의 반격이 본격적으로 다시 시작될 것으로 보인다.
신 전 부회장은 지난 10일 롯데 본사와 계열사에 대한 검찰의 압수수색이 진행되자 발 빠르게 성명을 내고 "창업 이후 최대 위기 상황이라는 중대성에 비춰 정기 주총에 앞서 롯데홀딩스 및 종업원 지주회에 경영정상화를 위한 긴급협의의 장을 설치하길 요구한다"며 주총 표 대결을 겨냥한 '판 흔들기'를 시작했다.
지난 8일 일본에서 서울로 건너온 신 전 부회장은 9일 열이 나는 신격호 총괄회장의 서울대병원(종로구 연건동) 입원에 동행했고, 12일 현재까지 병원을 오가며 신 총괄회장 곁을 지키고 있다. 재계 일각에서는 '아버지의 후계자'라는 이미지 부각을 염두에 둔 행보라는 해석도 나오고 있다.
롯데그룹 측은 한·일 롯데를 모두 장악한 신동빈 회장의 경영권 자체가 흔들리는 일은 없을 것으로 낙관하고 있다.
롯데 관계자는 "거듭된 수사 소식에 그룹 분위기가 가라앉은 것은 사실이지만, 종업원 지주회 등 롯데홀딩스 주요 주주들이 동요하는 움직임은 없는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이번 사정당국의 칼날이 롯데 오너일가를 향해있음에도 롯데 형제의 왕좌 다툼에 국민들의 분노는 하늘을 찌르고 있다. 더욱이 롯데가 한국에서 벌어들인 돈이 일본으로 간다는 '국부 유출' 논란이 이번 수사의 배경 중 하나로 알려지면서 롯데는 국적 논란에 이어 국부 유출에서도 자유로울 수 없는 상황이다.
한국 롯데의 지주사격인 호텔롯데는 해외계열사 지분이 99%에 달한다. 12개 L투자회사들의 지분율이 72.65%이며 일본 롯데홀딩스(19.07%), 광윤사(5.45%) 등이 주요 주주다.
이 때문에 한국에서 롯데가 벌어들인 이익이 배당금 형태로 일본으로 빠져나가며, 호텔롯데의 상장 시 구주 매각 과정에서 막대한 자금이 일본으로 흘러나간다는 점이 '국부 유출'이라는 지적을 받았다.
이에 대해 롯데그룹은 배당금을 통한 유출은 극히 일부이며 롯데가 벌어들이는 대부분은 국내에 재투자되고 있다고 강조했다. 이날 입장 자료를 통해 롯데그룹은 "롯데는 1967년 설립된 이래 경영활동을 통해 얻은 이익의 99%를 국내 사업에 재투자하고 있기 때문에 일각의 국부유출 논란은 사실과 다르다"며 "2014년 롯데그룹의 전체 영업이익은 3조2000억원이며, 일본 주주회사에 배당된 금액은 341억으로 약 1%에 불과한 수준"이라고 말했다.
◇재계 5위 롯데그룹의 창사 이래 최대 위기… 결국은 신격호의 '탐욕'이 뿌리= 재계 5위의 롯데그룹이 창사 이래 최대 위기를 맞은 것과 관련해 동주ㆍ동빈 형제의 경영권 분쟁이 단초가 됐다는 평가이지만, 결국 뿌리는 창업주 신격호 총괄회장의 '황제 경영'에 기인한다.
'손가락 경영'을 한다는 지적을 받을 정도로 황제형 총수로 군림해 온 신격호 총괄회장이 오늘날 롯데의 비극을 불렀다는 것이다.
지분율 0.1% 만으로도 신 총괄회장의 일명 '손가락 경영'이 가능했던 이유는 순환출자를 통한 복잡한 지배구조 장치 때문이었다.
80여개가 넘는 롯데그룹 계열사 최상위에는 호텔롯데가 있다. 호텔롯데는 롯데알미늄, 롯데물산의 지분을 직간접적으로 보유하고 있다. 또 롯데쇼핑, 롯데케미칼, 롯데제과, 롯데칠성과 같은 대부분의 자회사들은 롯데호텔와 롯데알미늄을 통해 지배받고 있다.
즉 호텔롯데의 경영권을 누가 쥐느냐가 사실상 롯데그룹 주인으로 인식되고 있는 것이다. 문제는 호텔롯데를 바로 일본의 롯데홀딩스가 지배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리고 일본 롯데홀딩스는 다시 광윤사가, 그리고 이 광윤사를 신격호와 동주ㆍ동빈 형제 등 3부자를 비롯한 총수일가가 지배하고 있는 구조다.
신 총괄회장이 경영일선에서 진두지휘할때는 전혀 잡음이 없었다. 한국롯데는 매출 84조원으로 현재 재계 5위로 성장했다. 반면 같은 선상에서 출발한 일본롯데는 5조7000억원에 그치면서 격차는 더욱 벌어지게 됐다. 매출 면에선 거의 20배 차이가 난다.
재계에서는 일찌감치 일본=신동주, 한국=신동빈 체제로 '신격호 포스트' 시대 정리가 됐다는 평가를 내놓았었다. 그러나 매출과 규모 면에서 차이가 확실한 한국 롯데와 일본 롯데의 '원톱 자리' 놓고 형제가 다투는 이유는 무엇일까. 롯데그룹 지배구조의 최정점에는 일본회사가 있기 때문이다.
한국 롯데그룹의 원톱이 되더라도 일본에서 브레이크를 건다면 진정한 롯데의 주인이 될 수 없는 특히한 롯데 구조가 경영권 분쟁의 출발점이란 것이다. 그리고 이상한 한국 롯데와 일본 롯데의 구조는 신 총괄회장의 작품이다.
한 재계 관계자는 "신 총괄회장이 강력한 카리스마를 갖고 있을때는 문제가 없었지만, '포스트 신격호' 시대에서는 경영권 다툼이 일어날 수 밖에 없는 구조였다"며 "신 총괄회장이 사전에 경영권 정리를 명확히 하지 않은 것이 오늘날 롯데의 비극을 초래한 것"이라고 분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