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28일(현지시간) 민주당 대통령 후보인 힐러리 클린턴이 후보 지명 수락 연설을 하기 바로 직전, 대회장 연단에 선 칸은 공화당 대선 후보인 도널드 트럼프를 신랄하게 공격한 다음 “도널드 트럼프! 제가 묻건대 당신은 미국 헌법을 읽어 본 적이 있습니까?”라며 주머니에서 포켓북을 꺼내 들었습니다.
미국 헌법이 담긴 작은 책자를 꺼내 든 그는 “제가 이 사본을 기꺼이 빌려 드리겠습니다. 여기서 ‘자유’와 ‘평등한 법의 보호’라는 말을 찾아보십시오. 당신은 알링턴국립묘지를 가 본 적이 있습니까? 거기 가서 미국을 지키다 죽은 용감한 애국자들의 묘지를 보십시오. 당신은 거기서 모든 신앙과 성별과 인종을 보실 것입니다. 당신은 아무것도 희생한 것이 없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2분간의 짧은 이 연설은 전당대회장을 열광의 도가니로 만들었고 클린턴의 연설을 위해 최고의 카펫을 깔았습니다. 칸의 연설은 폭발성과 설득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의 묵직한 목소리와 자신감에 찬 이미지는 이민자 영어에서 느낄 수 있는 이질감의 액센트를 뛰어넘는 호소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무엇보다도 이 연설이 호소력과 설득력이 있었던 것은 그가 이라크전에서 순국한 전사자의 아버지라는 데 있었습니다.
파키스탄에서 변호사가 된 후 아랍에미리트로 이주했다가 다시 미국으로 이민, 하버드대 법대를 졸업한 칸은 무슬림입니다. 그의 아들 후마윤 칸(Humayun Khan)은 이라크전에서 전사한 뒤 골드스타 (Gold Star) 무공훈장을 받은 미군 대위였습니다. 전쟁터나 나라의 일을 하다가 희생된 사람은 최고의 경의와 존경을 받고 모든 것을 압도하는 것이 미국의 의식입니다. 비록 전쟁을 반대하고 비판했던 사람도 전사자에 대해서는 겸허하게 경의를 보내는 것이 미국 의식의 불문율입니다.
칸의 연설은 하나의 특별한 연설로 끝날 수 있었습니다. 이 연설을 사건으로 만든 것은 트럼프였습니다. 트럼프로서는 이 연설을 들으면서 피가 솟구쳤을 것입니다. 그의 급하고 안하무인의 성격은 칸의 칼날 같은 공격을 그대로 맞고 있을 수 없었고, 즉시 트위터에 칼을 뽑았습니다.
“그의 부인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었는데 아마도 아무 말도 해서는 안 되기 때문일지도 모릅니다.”
이 트위트는 순식간에 엄청난 불길을 만들었습니다. 트럼프가 칸과 대적하기 위해 단신으로 이 불길 속에 뛰어들었을 때, 트럼프는 칼을 휘두르기도 전에 이미 만신창이가 되었습니다. 공화당 지도자들은 물론 트럼프의 측근과 지지자들까지도 비판의 목소리를 냈고 전사자 유가족과 군인 가족들이 비판의 대열에 섰습니다. 트럼프의 참모들까지도 트럼프가 너무 나갔다는 것을 시인했고 트럼프는 사면초가에 직면했으며, 지지 기반이 휘청거렸습니다.
트럼프는 곧바로 트위터에 다시 트위트를 보냈습니다. “미스터 칸은 나를 모르는데 민주당 전당대회 무대에서 나를 극렬하게 공격했고 모든 TV에서 똑같이 그렇게 하고 있습니다. 나이스!” 이 트위터는 기고만장했던 트럼프의 기가 꺾인 것을 뜻하는 것이었습니다. 곧이어 나온 여론조사에서 트럼프의 지지도가 떨어져 클린턴과의 지지폭이 작게는 8%, 크게는 13%까지 벌어졌습니다. 그리고 선거를 좌우하는 스윙 스테이트(경합주)의 지지도는 막상막하에서 10% 이상으로 우수수 떨어졌습니다.
트럼프가 직접 트위터의 칼을 뽑지 않고 분기를 죽였더라면 ‘키즈르 칸’은 사건이 되지도 않았을 것이고 충격도 크지 않았을 것입니다. 트위터에도 무슬림 히잡을 쓴 부인이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서 있는 것에 대해, 특정 종교 문화로 추측해서 비아냥거릴 것이 아니라 정중한 정공법을 썼으면 재앙이 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칸의 연설은 양날의 칼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칸은 아들의 순국을 정치 무대로 끌고 들어왔습니다. 금성무공 훈장을 받은 영웅 아들의 후광을 이용해 특정 정당의 후보를 지지한 것이기도 합니다. 칸은 트럼프가 무슬림의 미국 입국을 잠정적으로 중지시키겠다는 것이 비헌법 비인간 비이성적이라는 것을 말하기 위해서였지만 그 장소가 정치 무대였습니다.
칸의 연설은 정치적 논쟁을 제기하 동시에 그 내용과 언동이 정치적이었고 신랄했습니다. 역풍이 불 소지가 충분히 있었습니다. 순국용사는 물론 그의 가족을 절대로 비판하거나 모욕해서는 안되는 신성불가침 지역을 트럼프가 겁도 없이 조롱해서 자업자득이 되었으나 이 문제를 논객이나 여론 형성자들에게 맡겼다면 상황이 달라질 수도 있었습니다. 금성무공 훈장 가족을 비판해서는 안 되지만 그 가족이 정치적, 사회적 이슈를 제기했을 때는 거기에 대한 반격은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라크 전쟁에 참가해 순국자가 된 것은 영웅적인 희생이지만 칸 아들의 희생이 이슬람 극단 세력의 테러에 대한 공포의식을 불식해주는 것은 아닙니다. 무슬림 가운데도 미국을 위해 희생한 영웅이 있었다는 것을 상징해주는 것이지만 극단적인 이슬람들이 갖는 서구에 대한 증오심과 테러 문화를 완화시켜주는 것은 아닙니다. 트럼프의 무슬림 이민 중지가 정당하지 못함에도 불구하고 백인들의 호응을 얻었던 것은 테러 위협을 주는 자생적인 테러 세력을 배양하는 것에 대한 불안 심리였습니다.
혼자서 북 치고 장구 치는 트럼프의 원맨쇼가 아니었으면 칸과 클린턴의 연결 고리 문제와 칸의 개인 신상 문제가 불거져 나오는 역풍이 불었을 가능성이 있었습니다. 칸이 일했던 워싱턴 변호사 사무실이 클린턴의 재정과 세금을 관리했었다는 보도가 나오고 이 변호사 사무실이 사우디아라비아 정부와 깊은 연관이 있었다는 주장까지 흘러나왔습니다.
그리고 칸이 ‘샤리아(Sharia)’가 서구의 어떤 헌법보다도 우선하고 앞선다는 주장을 했다는 글이 나오고 있습니다. 무슬림의 세상적 율법의 등뼈라고 할 수 있는 샤리아는 무슬림들이 공개적으로 도전받는 양자 택일의 문제이기도 합니다. 미국 헌법과 샤리아가 상충할 때 어떤 것을 선택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철저한 무슬림들은 헌법보다 샤리아가 우선한다고 말하지만 많은 무슬림들은 애매하고 곤혹스러운 입장에 처하게 됩니다. 칸이 미국 헌법보다 샤리아가 우선한다는 주장을 한 것이 사실이라면 그가 민주당 전당대회에서 미국 헌법이 담긴 포켓북을 들고 기염을 토한 연설이 희석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설사 이것이 사실이라고 해도 늦었습니다. 이미 결투는 끝났고 트럼프는 만회하기 힘든 상처를 받았습니다.
트럼프에게 재앙이 된 칸과의 결투에서의 패배는 성질을 절제하지 못하는 트럼프의 성격과 함께 트위터가 중요한 몫을 했습니다. 미국 소셜 미디어의 큰 축을 이루고 있는 트위터는 순발력과 타이밍을 주는 적시 안타가 될 수는 있지만 언어와 생각과 감정을 여과하지 못하고 판단력과 분별력을 흐리게 할 수 있습니다. 지도적 위치에 있는 사람들, 특히 대통령이 될 사람이 트위터를 애용하는 것은 스스로 실수를 준비하는 것입니다.
이길 가능성까지도 있어 보이던 트럼프에게 패색의 그림자가 깃들고 있습니다. 그 결정타가 칸 사건입니다. 트럼프의 성질과 독선이 ‘키즈르 칸’을 역사적 사건으로 만들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