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화여대 교수
어린 시절 우리 집엔 ‘일하는 언니’가 둘 있었는데, 언니들 손에 이끌려 동네 극장을 자주 출입하곤 했다. 언니들이 굳이 나를 데려간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하나는 내 키가 유달리 작았던 탓에 4학년 때까지도 극장을 ‘공짜로’ 들락날락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고, 다른 하나는 나를 데리고 가면 뭇 남성들의 집적거림에서 어느 정도 자유로울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덕분에 난 어릴 적부터 신성일, 신영균, 최무룡, 남궁원에 윤정희, 문희, 남정임, 고은아가 주연으로 나오는 어른용 영화를 실컷 감상(?)하는 호사를 누렸다. ‘저 하늘에도 슬픔이’를 보며 주인공의 눈물겨운 사연에 가슴 아파하기도 했고, ‘미워도 다시 한 번’을 보며 아역배우 김정훈의 연기에 감동해 함께 울기도 했다.
한데 정작 가장 기억에 남는 영화는 납량특집 ‘혹 달린 여자’(제목이 정확하진 않지만)였다. 얼굴 한쪽이 커다란 혹으로 뒤덮였던 주인공의 흉측한 모습이 너무 무서워, 함께 간 언니의 팔을 꼭 붙잡고 한쪽 눈을 가린 채 벌벌 떨며 영화를 보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이후로 귀신영화는 절대로 안 본다는 불문율이 생겼다.)
중·고등학교 시절엔 중간시험이나 학기말 시험이 끝나는 날 단체 관람을 하곤 했다. 당시는 중·고등학생의 극장 출입을 엄격히 규제했던 시기인지라, 나 같은 범생(凡生)들은 모처럼의 단체 관람을 손꼽아 기다리곤 했다. 우리가 단골로 갔던 극장으로는 대한극장, 단성사, 피카디리, 국제극장 등이 떠오르고, ‘벤허’, ‘십계’, ‘기적’, ‘닥터 지바고’ 등의 대작을 보았다. 영화 시작 전 모두 일어나 애국가 한 번 부르고 ‘대한 늬우스’ 보고 나서야 영화가 시작되던 시절을 생각하노라면 웃음이 절로 난다.
대학 시절 영화 관람은 연인들의 단골 데이트 코스였는데, 주말이면 극장 앞에 긴 줄이 늘어서고 암표상이 활개를 치곤 했다. ‘별들의 고향’, ‘영자의 전성시대’, ‘겨울여자’, ‘고래사냥’ 등이 당시 대학생의 필수관람 목록이었는데, 유독 대학 3학년 때 ‘스타워즈’를 보며 느꼈던 생경함이 오래도록 기억에 남아 있었다.
1980년대 후반 미국으로 유학을 떠났는데 그곳의 극장은 모두 여러 편의 영화를 동시에 상영하는 복합 상영관이란 사실이 매우 신기하게 느껴졌다. 가난한 유학생에게 영화 관람은 나름 호사스런 취미였는데, 미국의 극장은 친절하게도 들어가는 통로가 하나인지라 주말이면 친구와 함께 영화 한 편 값만 내고 들어가 몰래 여러 편의 영화를 공짜로 보는 은밀한 일탈을 즐기곤 했다. 굳이 영화표를 점검하는 직원이 없었기에 2편은 기본이고, 많게는 4편까지 본 후 기진맥진해서 집으로 돌아온 적도 있었다.
이제 우리에게도 CGV나 메가박스와 같은 복합 상영관이 익숙한 풍경이 되었다. 한데 이들 복합 상영관을 찾을 때마다 영 익숙해지지 않는 불편함이 있다. 이번 폭염에도 어르신을 모시고 집 가까이 새로 문을 연 CGV를 찾았는데 “내가 지금 미국에 와 있는 건지 한국에 있는 건지” 도무지 구분이 안 되는 것이 아닌가.
영화표를 끊으려는데 한 편엔 ‘self ticketing’이란 팻말이 걸려 있고, 반대편 구석엔 ‘ticket box’란 팻말이 걸려 있었다. 하기야 요즘은 인터넷을 통해 예매하고 오는 고객이 많을 테지만, 그래도 한글 팻말은 눈을 씻고 찾아보려야 볼 수가 없음에 은근히 화가 치밀었다. 한글만을 고집하는 폐쇄적 국수주의자는 물론 아니지만, 그렇다고 온통 영어로 뒤덮인 국적 불명의 영화관을 찾는 일은 결코 유쾌하지 않았음을 고백하련다.
영화관은 어린 시절 추억을 쌓을 수 있는 공간이자 남녀노소가 함께 즐길 수 있는 흔치 않은 공간이다. 그런 만큼 우리 것의 가치와 의미를 자연스럽게 체험할 수 있는 ‘개념 있는 공간’으로 다시 꾸며봄은 진정 멋진 생각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