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사와 함께하는 북人북
문학, 예술, 철학을 넘나들며 심미주의적 삶의 기술을 탐구해온 문광훈(文光勳·52) 충북대학교 교수. 지난해 <심미주의 선언>을 통해 삶의 심미성과 인문학적 사유를 펼쳤던 그는 “인문학을 공부하는 것은 자기 삶의 기술을 터득하는 것과 같다”고 이야기한다. 책임 있는 말과 생각, 느낌 등을 통해 오늘의 삶을 쇄신하는 것이 인문학의 최종 수렴점이라는 것. 문 교수는 이를 위한 인문서로 <세 개의 동그라미>를 추천한다.
<세 개의 동그라미>는 김우창 고려대학교 명예교수와 그의 제자인 문광훈 교수의 대담이 실린 책이다. 2008년 한길사에서 펴낸 이후 올해 <김우창 전집>(총 19권, 민음사) 중 한 권으로 다시 나오게 됐다. 700쪽이 넘는 분량이지만 일상의 삶과 학문의 삶, 감각과 사유의 의미, 예술과 현실의 관계, 정의와 너그러움 등 다양한 주제가 두 사람의 대담으로 이뤄져 어렵지 않게 읽을 수 있다. 이와 더불어 문 교수는 우리 시대 대표 지성으로 알려진 김우창 교수의 지적인 넓이와 깊이를 보여준다는 점에서 권할 만하다고 설명했다. 무엇보다 그에겐 존경하는 스승과 함께 이름을 올린 책이기에 의미가 남다르다.
“대학생 시절에 선생님을 보면 도망 다니곤 했어요. 경외심이라고 하죠. 존경하고 두려워하는 마음에 가슴이 터질 것만 같았거든요. 아직 선생님과 이야기할 준비가 덜 됐다고 생각했죠. 그래서 선생님 책을 열심히 읽으며 흠모하는 마음을 간직하고 있었어요. 졸업하고 독일로 유학을 떠났는데 저에겐 학위를 따는 것보다 더 큰 목표가 ‘김우창론’을 쓰는 거였죠. 돌아오자마자 집필 작업에 몰두해 <구체적 보편성의 모험: 김우창 읽기>(2001)를 펴냈어요. 그 뒤로도 몇 권 더 냈는데, 내세우면서 직접 보여드리진 못했죠. 그런데 어느 날 선생님께서 대담 파트너로 저를 꼽으셨다는 거예요. 너무나 큰 영광이었죠.”
대담은 약 5개월 동안 11차례에 걸쳐 김 교수의 집에서 이뤄졌다. 평균 4시간 정도 질의응답이 오갔는데, 문 교수가 준비한 질문만 A4 용지로 50여 장에 달했다고 한다. 평소 김 교수의 책을 섭렵했던 그이지만, 대담 주제를 선정하고 질의서를 꾸리는 데만 두어 달이 걸렸다. 그만큼 인문학에서 다룰 수 있는 거의 모든 주제에 대한 이야기가 묵직하게 실려 있다. 이 모든 것을 함축하는 책의 제목인 <세 개의 동그라미>는 ‘마음, 이데아, 지각’이라는 부제를 갖는다. 세 개의 동그라미가 뜻하는 바를 가늠할 수 있는 대목이다. 그렇다면 이 세 가지 요소의 관계와 그 의미는 무엇일까?
“선생님께서 지으신 제목입니다. 오감을 통해 느끼는 것을 지각이라고 하죠. 우리는 이것을 마음으로 느낄 거고요. 이 느낌은 우리가 경험하는 가시적인 것에 머물러 있지만 늘 그 이상을 꿈꾸잖아요. 그게 바로 이데아겠죠. 가장 경험적이고 감각적인 것 속에 초월적인 것이 있다는 겁니다. 말하자면 보고 느끼는 것 속에 보고 느끼는 것 이상의 세계가 있다는 거죠. 인간이 동물과 달리 인간이라 할 수 있는 것은 갈망하고 꿈꾸는 존재이기 때문 아닐까요? 꿈꾼다고 할 때 우리가 서 있는 곳은 어디입니까? 바로 지금 여기 감각과 경험의 세계죠. 이데아의 세계와 지각의 세계가 교차하는 것, 그 속에 삶의 신비가 있다고 생각해요.”
나의 삶을 갱신하는 기쁨, 매일 새롭게 느끼기
문 교수는 이 책을 읽는 데는 정해진 순서가 없다고 조언했다. 목차를 보며 마음에 닿는 부분부터 천천히 읽어가라는 것. 책을 읽는 데 조금이라도 의무감이 든다면 그때는 잠시 내려놓는 것이 좋다고 했다. 또 인문학을 읽으며 삶을 곱씹고 사유를 넓혀가는 과정에 꼭 필요한 것은 ‘휴식’이라고 강조했다.
“신사(愼思)해야 해요. 젠틀맨 말고요. 신중하게 생각하라는 거죠. 나이가 들수록 죽음에 대해 생각하잖아요. 몽테뉴는 철학이란 죽음을 연습하는 거라 했어요. 어떻게 잘 죽을 것인가 생각한다는 건 내가 지금 여기에서 오늘 하루를 어떻게 보낼 것인가를 고민한다는 것 아닐까요? 그런 고민을 깊고 넓게 하려면 일단 휴식해야 해요. 휴식이란 여행가고 놀고먹고 하는 게 아니라 모든 걸 내려놓고 정지하라는 거예요. 하던 일을 계속하면 내가 왜 이것을 하는지 어디로 가고 있는지 절대 알 수 없습니다. 가만히 앉아 있을 때, 내가 지금까지 행해왔던 것들이 나에게 오거든요. 그러면 자연스럽게 반성하고 성찰하게 되죠. 내가 왜 살아야 하고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고민하려면 잠시 정지하고, 가만히 나를 돌아봐야 해요.”
나를 돌아보는 데도 자신을 미화하거나 과장하지 않는 자세가 필요하다고 했다. 한 가지 더 염두에 둘 것은 인간은 어리석고 맹목적인 존재이기에 쉽게 변하리라는 것은 헛된 희망이라는 것이다.
“인간은 수많은 이해관계 속에 얽매여 살기 때문에 자유롭지 못하고, 그렇기 때문에 변하기 어렵습니다. 대개는 부질없음과 부질없음 사이에 끼어 있으리라는 것, 많은 것이 허황하게 끝날지도 모른다는 것을 인정해야 해요. 뼈아픈 인정이죠. 그런 현실에도 심각하게 고민하지 않는다면 내 삶은 그대로일 것이라는 것, 신중하게 생각하고 자신을 돌아보았을 때 단 1mm라도 고쳐나갈 수 있다는 것. 상당히 염세적이고 비관적이죠. 하지만 그게 오히려 솔직한 태도 아닐까요? 쉽게 행복해지고 달라질 수 있다는 것은 엄청난 자기기만이죠. 부정적인 모습일지라도 나만큼은 속이지 않겠다는 마음으로 자기를 직시하는 용기가 필요해요. 어렵지만 거기서부터 시작해야 우리는 삶을 더 충실하게 살아갈 수 있어요.”
그는 인간은 변화하기는 어렵지만, 매일 자신의 삶을 새롭게 생각하고 표현하는 데 인생의 기쁨이 숨어 있다고 덧붙였다.
“우리가 살면서 얻을 수 있는 최고의 기쁨은요, 변하는 것이 아니라 하루하루를 새롭게 느끼면서 얻는 거예요. 새롭고 신중하게 사유하면서 나의 감각이나 사고, 라이프스타일을 되돌아볼 가능성을 가질 수 있어요. 그러면서 자신만이 납득할 수 있는 삶의 기준과 형식을 스스로 조직해가는 과정을 경험하는 거죠. 그게 바로 자기 쇄신의 기쁨입니다. 그런 점에서 자기 기준이 높아지고, 삶의 원칙이 생기면 유행이나 세평에 민감해지지 않게 되죠. 그렇게 되면 내 삶이 결코 공허하게 느껴지지 않아요. 나이 들어 인생이 공허하다는 것은 남들이 좇아온 가치에 매진해왔다는 겁니다. 어제보다는 조금 다르게 새롭게 느끼다 보면 우리의 인생은 조금씩 나아지고, 허황한 죽음을 맞을 가능성도 줄어들게 되겠죠.”
개성 있는 주체가 만드는 이상적인 사회
자신만의 삶의 원칙이 있다는 것은 곧 남과 비교하지 않는 삶을 산다는 것 아닐까? 문 교수는 자신만의 세계와 개성을 찾으려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했다.
“요즘은 SNS에 이런저런 사진을 올리고 댓글을 다는 사람이 많은데, 그건 자기과시용 얕은 개성이라고 생각해요. 그것도 개성의 하나이지만 오래가는 개성은 아니죠. 개성이 강하다는 건 남에게 과시할 목록이 아니라 자신의 가치나 감각을 풍성하게 만드는 목록이 많다는 거예요. 빌린 언어나 관념을 자기 것처럼 쓰는 게 아니라 자신만의 책임 있는 말과 생각으로 서투르더라도 자기 의견을 이야기하는 것, 그게 참 개성이죠. 그런 책임 있는 주체가 많을수록 이상적인 공동체 사회가 될 수 있지 않을까요? 타인에게 정의를 내세우면서 옥죄는 것이 아닌, 나로부터 시작한다면 스펀지에 물이 스미듯 느리지만 좋은 의미에서 전염되겠죠. 저는 그런 세상을 꿈꿉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