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여성인물사전] 71. 공예태후

입력 2017-03-14 1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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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안 任씨 첫 고려 王妃…무신정변 후 불행한 삶

공예태후 임씨(恭睿太后 任氏, 1109~1183)는 고려 인종의 제3비로, 1126년 인종이 이모였던 두 왕비와 이혼하고 맞이하였다. 본관은 정안(전남 장흥)이며, 아버지는 중서령 임원후, 어머니는 수주(樹州, 인천시 부평) 이씨로 문하시중 이위의 딸이다.

그녀가 태어났을 때 외할아버지는 꿈에 황색 깃발을 집의 문에 세웠는데 깃발 꼬리가 궁궐 치미를 싸고돌며 휘날리는 것을 보았다. 외할아버지는 그녀가 훗날 왕비가 될 것이라 하였다. 그녀 나이 15세에 혼인을 하는데, 혼례식 날 병이 나 거의 죽을 지경이 되었다. 신랑을 돌려보내고 점을 치니, 점쟁이는 그녀가 왕비가 될 것이라 했다. 이자겸은 소문을 듣고 임원후를 개성부사로 강직시켰다. 그런데 개성부 막료 꿈에 다시 청사의 대들보가 벌어지며 그 구멍에서 황룡이 나오는 것을 보았다. 인종도 임씨 성을 가진 후비를 맞이할 꿈을 꾸었다.

이렇게 꿈 이야기가 많은 것은, 그녀가 왕비가 되는 것이 하늘의 뜻임을 강조하여 어떻게든지 혼인을 합리화시키기 위함이었다 할 수 있다. 그녀의 가문은 물론 훌륭하지만 국초 이래 단 한 번도 왕비를 배출하지 못하였다. 그간의 왕비 가문이었던 인주 이씨나 충주 유씨 등과는 비교도 되지 않았다.

그녀는 처음에 연덕궁주(延德宮主)로 불렸으며, 1127년 맏아들(의종)을 낳았고, 1129년 왕비로 책봉되었다. 1130년 둘째 아들(대령후 왕경)을, 1131년 셋째아들(명종)을 낳았다. 계속해서 그녀는 아들 둘(원경국사 충희, 신종)과 딸 넷을 더 낳았다. 왕비로서 그녀의 삶은 평탄했다. 왕비가 된 1년 뒤인 1127년에 인종은 병부상서 김선의 딸(선평왕후)과 또 혼인했지만 선평왕후는 자식이 없었다. 남편 인종은 24년간 왕위에 있다가 1146년 사망했다. 그러자 그녀의 맏아들인 의종이 즉위하고, 그녀는 왕태후가 되었다.

1170년 그녀의 생애에 처음으로 큰 불행이 닥쳤다. 차별 대우에 불만이 누적되어온 무신들이 난을 일으켜 정권을 잡았다. 의종은 폐위되어 태자와 함께 각각 거제와 진도로 추방되었다. 비록 그녀의 셋째아들이 명종으로 즉위하기는 했지만 권력은 무신들의 손에 있었다. 1173년에는 의종이 이의민에 의해 잔인하게 시해되었다. 1174년에는 이의방이 태자비를 내쫓고 자신의 딸을 태자비로 들이기도 하였다. 1182년에 넷째아들 충희가 죽었는데 태후는 무신들이 죽인 것으로 짐작하고 속을 끓이다 병이 들었다. 태후는 결국 1183년 75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순릉(純陵)에 안장하였으며 시호를 공예태후라고 하였다.

태후는 인주 이씨가 독식하던 왕비 자리에 새로운 인물로 간택되었다. 5남4녀의 자식을 낳았으며, 이 중 세 명이 왕이 되었고, 그녀는 태후가 되었다. 왕비 책봉문에 의하면 그녀는 ‘덕망 높은 가문에서 출생하여 모든 행동에 반드시 예절을 지켰다’고 되어 있다. 그녀 역시 당시대가 요구하던 도덕에 충실했던 여성이었다 하겠다.

공동기획: 이투데이, (사)역사 여성 미래, 여성사박물관건립추진협의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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