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식년 주거나 근로시간 단축하거나…기업들 강력 반발 ‘장벽’
‘저녁이 있는 삶’. 2012년 대선 당시 반향을 일으킨 한 후보의 슬로건이다. 한편에선 일자리난으로 고통받지만 한편에선 과로로 신음하는 한국 사회를 바꿔야 한다는 화두를 던져 다수의 국민들로부터 공감을 얻었다.
이번 대선에서는 노동자들에게 휴식 시간을 제공해 자기계발, 보육, 여가 등 개인 삶의 질을 높이고 과로사회를 극복하는 방안을 담은 공약들이 더욱 다양하게 쏟아져 나왔다. 크게는 두 가지 유형으로 나뉜다. 일정 기간 근속한 노동자에게 유급 장기 휴가를 주거나, 노동 시간을 단축하는 방식이다.
더불어민주당 소속 안희정 충남지사의 ‘전국민안식제’ 공약은 전자의 대표 사례다. 10년을 일하면 1년을 유급으로 쉴 수 있는 안식년제도를 공공 부문부터 시작해 민간까지 확대해 나간다는 구상이 골자다. 비정규직과 같이 1년 단위 근무 형태를 지닌 노동자는 안식월을 쓸 수 있도록 하거나 법정 연차 일수를 늘리는 등 제도 설계를 정교하게 하면 공공·민간, 대·중소기업, 정규직·비정규직 등 노동자 간 위화감이 생기는 부작용을 막을 수 있다는 게 안 지사 측 설명이다.
안 지사는 “OECD(경제협력개발기구) 국가 중 연간 노동 시간이 멕시코에 이어 두 번째로 긴 한국인에게 재충천, 재교육의 기회를 줘야 한다”면서 “회사 눈치를 보지 않고 학습, 여가, 돌봄을 할 수 있는 쉼표 있는 시대로 가자”고 제안했다.
정운찬 동반성장연구소 이사장의 ‘국민휴식제’도 마찬가지 맥락이다. 오랜 시간 강단에 섰던 정 이사장은 대학 교수들이 6년 근속하면 1년의 안식년을 부여받듯 직장인들도 기업 상황에 따라 ‘안식월+a’를 주고 이를 시행하자고 주장했다.
안 지사와 정 이사장은 이를 시행하는 직장엔 정부 조달, 지원금 지급 등에 있어 인센티브를 부여하는 방식으로 제도 확립을 꾀해 나가겠다는 방침이다.
노동 시간 단축은 대다수 주자들의 공통적인 약속이다. 민주당의 문재인 전 대표와 이재명 성남시장은 최근 국회에서도 논의했던 주 52시간 초과 노동 제한에 한목소리를 냈다. 주 7일 노동시간을 현행 68시간에서 52시간으로 줄이겠다는 것이다. 국민의당 안철수 전 대표와 정의당 심상정 대표는 연간 노동시간을 2110시간에서 1800시간으로 단축하겠다고 했다. 토·일요일과 법정 공휴일 10일, 연차휴가와 같은 휴가를 모두 사용하고 하루 8시간, 주 40시간씩만 일하도록 하겠다는 얘기다.
국민의당 손학규 국민주권개혁회의 의장은 단계적 정시퇴근제와 최소휴식시간제, 노동시간 상한제 도입 등 이번에도 ‘저녁이 있는 삶’을 약속했다. 바른정당 유승민 의원의 경우 칼퇴근법 도입, 노동시간 외 카카오톡 등을 이용한 업무지시를 막는 ‘돌발노동’ 금지를 내세워 눈길을 끌었다.
노동시간 단축은 일과 가정의 양립을 넘어 일자리 창출 효과도 있다는 게 주자들의 주장이다. 일자리 나누기 개념으로 주 52시간 초과 노동을 금지하면 일자리 50만 개가 새로이 생겨나고, 전국민안식제를 도입하면 공공 일자리 15만 개가 창출된다고 했다.
그러나 안희정 지사가 강조했듯 안식제 도입이나 노동 시간 단축엔 노사 간, 사회적 대타협이 전제돼야 할 것으로 보인다. 야근 등을 못하게 되면 임금이 감소하는 노동자들, 수당 지급 없이 노동자에게 시간외 노동을 부렸던 일부 기업 등은 적잖은 타격을 입을 수밖에 없는 까닭이다.
특히나 노동 시간 단축은 기업들에 민감한 사안이다. 최근 국회의 노동 시간 단축 추진도 중소기업들이 구인난을 이유로 강력 반발하면서 논의를 중단시켰다. 중견기업연합회에선 “근로시간을 주 52시간으로 단축하면 기업 인건비 부담이 12조 원 늘어난다”는 목소리도 나왔다.
이에 따라 사회적 공감대를 형성해 나가는 노력이 선행되지 않는다면, 사회에 새로운 갈등 요인만 만들게 될 것이란 지적이 나온다. 우선 사회적 대타협을 도출해 내는 노력을 벌인 뒤 법적 강제력을 부여하지 않으면 실현 가능성이 낮다는 진단이다. 국민안식제와 같은 새로운 제도 도입 역시 사회적 분위기와 강력한 유인책 또는 제재 없이는 유명무실한 육아휴직제도처럼 힘을 발휘하지 못할 것이란 비판에 직면해 있다.
이상민 나라살림연구소 연구위원은 28일 “법인세를 매길 때에 특근, 야근수당 등의 비용을 인정해 주지 않는 손금불산입과 같은 방식으로 기업들을 압박하지 않는 이상 근로시간 단축을 이루기는 쉽지 않다”면서 “공약의 실현 가능성을 위해선 주자들이 시장친화적인 규제도 고민해 봐야 한다”고 조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