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대만이 중국보다 환율조작국 지정 가능성 커…한미 무역협상 카드로 쓸 수도”
오는 4월 15일 미국 재무부의 ‘반기 환율보고서’ 발표를 앞두고 블랙 리스트에 오른 나라들 사이에 긴장감이 고조되고 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지난해 대선 유세 당시, 취임 첫날 중국을 ‘환율조작국’으로 지정하겠다고 엄포를 놓았지만 그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다. 언제 터질지 모를 폭탄에 불안감은 갈수록 커지고 있다. 이런 가운데 홍콩 사우스차이나모닝포스트(SCMP)는 30일(현지시간), 중국보다는 한국과 대만이 환율조작국에 지정될 가능성이 크다고 전했다.
미 재무부는 6개월마다 자국 의회에 교역대상국의 경제와 환율 동향을 보고한다. 특히 미국의 막대한 무역수지 적자와 관련해 교역대상국의 외환시장 개입을 경고하는 메시지도 이 보고서에 포함돼 있다. 환율보고서에서 환시 개입과 관련해 가장 수위가 높은 경고장이 바로 환율조작국 지정이다.
미 재무부는 환율조작국 지정에 대해 해당국의 대미 무역수지 흑자가 200억 달러(약 22조3400억 원) 이상일 것, 국내총생산(GDP) 대비 경상수지 흑자 비율 3% 초과, GDP 대비 2%가 넘는 일방적인 외환시장 개입 등 3가지 기준을 갖고 있다. 이 기준들을 모두 충족하면 환율조작국으로 지정할 수 있는 것이다. 이들 조건 중 한두 가지를 충족해 지난해 10월 보고서에서 환율조작국 전 단계인 환율관찰대상국에 지정된 국가는 우리나라와 중국 일본 독일 대만 스위스 등 총 6개국이다. 일본 다이와캐피털마켓의 애널리스트인 케빈 라이와 올리비아 샤는 보고서에서 “한국 등 세 나라 모두 3가지 조건에 다 걸리지는 않는다”며 “또 재무부가 이번에는 어떤 나라도 환율조작국으로 지정하지 않을 가능성이 크다. 그러나 트럼프는 이후 기준을 변경할 수 있다”고 언급했다. 이어 “만일 트럼프가 기준 문턱을 낮추면 세 나라 모두 환율조작국에 지정될 수 있다”며 “현재 중국은 첫째 조건을, 한국은 첫째와 둘째, 대만은 둘째와 셋째 조건을 각각 충족한 상태”라고 지적했다.
앞서 영국 파이낸셜타임스(FT)는 지난달 막대한 경상수지 흑자를 근거로 한국과 대만이 중국, 일본보다 더한 환율조작국이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여기에 보호무역주의를 내건 트럼프의 미국이 세계 최강대국으로서 갑질을 하기에 한국이 적합한 상대라는 주장도 나오고 있다. 사실, 미국이 중국을 환율조작국으로 지정하더라도 제재할 수단이 마땅치 않다. 미국은 환율조작국 지정 후 1년간의 협상을 거친 뒤에 타결에 실패하면 해외민간투자공사(OPIC)를 통한 금융지원 금지 조치를 내릴 수 있는데 이미 중국은 1989년 톈안먼 사태 무력 진압으로 OPIC 지원이 끊긴 상태다. 그러나 한국은 제재 타격을 받는 것은 물론 트럼프의 성토 대상이 되는 자유무역협정(FTA)을 미국과 맺은 상태이기 때문에 공정한 무역을 강조하는 트럼프가 이래저래 세계에 보호무역주의를 과시하기 좋은 상대다. 유럽 최대 경제국이며 막대한 무역흑자를 올리는 독일은 유로존 체제 안에 있기 때문에 미국이 환율로 시비를 걸기가 쉽지는 않다.
한국은 환율조작국으로 지정되면 1년간 트럼프 정부와 고통스러운 협상을 해야 한다. 특히 그 초점은 한미 FTA 재협상을 통한 대미 무역역조(한 나라의 수입액이 수출액보다 많은 상태) 해소에 맞춰질 것으로 보인다. 미국 무역대표부(USTR)는 최근 보고서에서 한미 FTA 발효 이후 미국의 한국산 제품 수입은 130억 달러 증가했지만 반대로 대한국 수출은 12억 달러 감소했다며 한미 FTA 재검토를 권고했다. 세계정책연구소의 제임스 놀트 국제 정치경제 애널리스트는 “트럼프 정부가 한국의 비관세 장벽을 낮추고 미국 제품에 새 시장을 열고자 환율조작국 지정을 협상 카드로 쓸 수 있다”고 예상했다.
이에 일각에서는 한국이 제2플라자 합의의 희생양이 될 수 있다고 예상하고 있다. 플라자합의는 미국과 프랑스 독일 일본 영국 등 당시 주요 5개국(G5) 재무장관이 환시 개입으로 인한 달러화 강세를 바로잡기로 합의한 것으로 사실상 엔저로 막대한 대미 무역흑자를 거뒀던 일본을 겨냥한 것이다. 일본은 플라자합의 이후 엔화 가치가 오르면서 사상 최대의 버블경제가 형성된 다음 붕괴돼 이후 ‘잃어버린 10년’으로 불리는 경제 암흑기를 맞았다.
한국은 일본보다 내수 비중이 작기 때문에 원화 강세에 따른 수출 부진 타격 충격이 더 클 수밖에 없다. 게다가 이미 가계부채도 막대한 상황이어서 버블 붕괴 가능성도 플라자합의 이후 일본보다 더 높다. 이에 다이와캐피털마켓은 한국이 미국의 강경한 태도를 누그러뜨리고자 올해 원화 강세를 용인할 것이라고 예상했다. 실제로 미국 달러화당 한국 원화 가치는 올 들어 약 8% 올랐다. 이는 중국 위안화 가치 상승폭인 0.7%를 압도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