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선후보 인물탐구 ②안철수] 산전수전 겪은 정치인생 5년…이번엔 철수없다 ‘强철수’

입력 2017-04-06 11:11수정 2017-04-12 13: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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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사 출신 프로그래머에서 ‘녹색 돌풍’…‘文대세론’ 뒤집을 대항마로 급부상

국민의당 대선 후보 안철수 전 대표의 인생은 ‘도전’의 연속이다. 의학박사, 컴퓨터 바이러스 백신 개발자, 벤처기업 최고경영자(CEO) 등을 거쳐 정당 대표까지 항상 새로운 분야를 개척했다. 대선 도전도 두 번째다. 갖은 정치 역정 끝에 5년 전 대권 도전을 양보했던 문재인 더불어민주당 후보와 본선에서 맞붙게 됐다. 최근 들어 안 후보는 굵고 강한 목소리로 이미지 변신을 시도하면서 ‘강철수’라는 별명까지 얻었다.

◇‘의사’에서 ‘컴퓨터 프로그래머’로 변신 = 안 후보는 1962년 부산에서 2남1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부산고등학교를 졸업하고 1980년 서울대 의대에 입학했다. 의대 박사과정까지 밟던 그는 1988년 초 ‘브레인 바이러스’가 한국에 상륙하는 것을 목격했다. 컴퓨터를 구입해 독학으로 공부하고 있던 안 후보는 해당 바이러스를 분석해 이를 퇴치할 백신 프로그램을 만들어 무료로 배포했다.‘V3’ 첫 버전의 탄생이었다. 이 사실은 언론을 통해 세상에 알려졌고, ‘의사’가 아닌 ‘프로그래머’ 안 후보를 찾는 사람들이 늘었다. 의사 겸 백신 프로그래머로서의 생활은 7년간 지속됐다. 오전 3시에 일어나 오전 6시까지 백신을 만들고, 낮에는 교수(1989~1991년), 군의관(1991~1994년)으로 사는 이중 생활을 했다. 결국 안 후보는 1995년 의사의 길을 접고 서울 서초동 뒷골목에 ‘안철수 컴퓨터바이러스연구소(안랩)’라는 벤처기업을 설립했다.

안랩 창업 초기에는 어려움이 많았다. 직원들 월급 줄 돈을 마련하느라 은행에 속칭 ‘어음깡’을 하는 일이 다반사였다. 그는 “당시 소원이 ‘단 한달만 월급 걱정 안하고 살았으면’이었다”고 회상하기도 했다. 시행 착오를 거듭했던 안랩은 1997년 미국 백신업체 맥아피로부터 1000만 달러에 회사를 인수하겠다는 제의가 들어왔지만 거절했다. 이후 1999년 체르노빌 바이러스 사건을 계기로 급성장했다. 안랩은 국내에 유입된 바이러스를 퇴치하면서 회사 주가를 올렸다. 안 후보는 안랩 창립 10주년인 2005년 대표이사직을 전문경영인에게 물려줬다. 유학길에 오른 그는 2008년 펜실베이니아대 와튼스쿨 경영학석사(MBA) 과정을 마친 뒤 카이스트 석좌교수로 임용됐다. 2011년에는 서울대 융합과학기술대학원장으로 자리를 옮겼다. 2012년에는 자신이 보유한 안랩 주식의 절반을 동그라미재단 창립을 위해 내놓기도 했다.

◇ 청춘콘서트로‘안철수 신드롬’일으켜 정계 입문 = 안 후보는 2009년 MBC 예능프로그램 ‘무릎팍도사’ 출연을 계기로 대중적 인지도를 넓혔다. 이후 그는 2011년 25개 도시를 돌며 ‘청춘콘서트’를 열어 청년들을 직접 만나고, 자신의 경험과 배움을 나누며 그들의 ‘멘토’로 활약했다. 열기는 뜨거웠다. 언론은 이를 ‘안철수 현상’이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이 현상은 2011년 서울시장 재보궐 선거 여론조사 지지율로 나타났다. 안 후보는 50%가 넘는 지지율을 기록하며 유력 서울시장 후보로 떠올랐다. 출마하면 당선이 가능한 분위기였다. 그러나 당시 5%대 지지율에 불과했던 박원순 현 서울시장에게 과감한 양보를 하면서 후일을 기약했다.

그는 일보후퇴 후 이보 전진으로 2012년 대선을 선택했다. 당시 서울 종로에 ‘진심캠프’를 꾸리고 무소속 대선 후보로 존재감을 드러냈다. 대선구도는 ‘박근혜-문재인-안철수’ 3자 대결로 흘러갔다. 그러나 야권의 표가 둘러 나뉘면서 박근혜 후보가 우위를 보였고, 야권에서는 단일화 요구가 거세게 일었다. 이에 안 후보는 문 후보와 단일화 협상에 나선 끝에 ‘양보’라는 결정을 내렸다. 그러나 기회는 또 있었다. 그는 2013년 4월 서울 노원병 보궐선거에 당선돼 국회에 입성했다. 2014년 1월에는 ‘새정치연합’을 창당해 당대표 자리에 올랐다. 새정치연합은 불과 두 달 뒤 민주당과 합당해 ‘새정치민주연합’으로 재탄생했다. 안 후보는 김한길 대표와 공동대표를 지내면서 본격적으로 ‘체급’을 올렸다.

◇ 우여곡절 끝에 ‘안풍(安風)’재점화…‘문재인 대항마’로 = 그러나 시련이 닥쳤다. 2015년 7·30 국회의원 재보선에서 새정치연합이 새누리당에 참패하면서 안 후보는 당대표 직을 내려놔야 했다. 이후 노선 갈등으로 탈당한 뒤 2016년 2월 호남지역 의원들을 중심으로 국민의당을 창당하면서 재도약의 발판을 마련했다. 이어 천정배 의원이 이끄는 ‘국민회의’와 박주선 의원의 ‘통합신당’와 합당해 세를 불렸다. 결과적으로 국민의당은 4·13총선에서 38개 의석을 거머쥐었다. 정당득표율은 26.74%를 차지하며 2위를 기록, 새누리당과 더불어민주당에 이어 원내 제3당의 지위에 올랐다. 이후 주요 이슈 법안에서 ‘캐스팅보트’ 역할을 하며 원내 존재감을 굳혔다. 다만 안 후보는 현재 무죄로 1심 판결이 난 선거 ‘홍보비 리베이트’ 사건이 불거져 대표직을 내려놓는 아픔을 겪기도 했다. 이러한 우여곡절 끝에 안 후보는 이번 대선에서 민주당 문 후보의 가장 강력한 대항마로 떠올랐다. 안 후보는 “마침내 안철수의 시간이 왔다”며 “기필코 대선에 승리하겠다”고 다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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