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여성인물사전] 90. 장경왕후(莊敬王后)

입력 2017-04-10 10: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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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의종의 첫째 부인…무신란으로 몰락

장경왕후(莊敬王后, 생몰년 미상)는 고려 의종(毅宗, 1127~1173)의 제1비이다. 아버지는 강릉공 왕온(王溫)으로, 문종과 인경현비(인주 이씨, 이자연의 딸)의 아들인 조선공 왕도(王燾)의 아들이다. 1143년 태자비로 간택되었으며, 1146년 의종의 즉위로 왕비가 되었다.

1149년 맏아들 왕기(王祈)를 낳으니, 혼인한 지 6년 만이었다. 그간 의종은 아들을 몹시 기다렸던 듯하다. 의종의 남동생이 4명이나 되었고, 또 그간 왕위가 동생에게 간 사례도 많았기 때문이다. 의종은 왕후와 함께 흥왕사에 가서 만일 아들을 낳게 되면 금은(金銀) 글씨로 쓴 화엄경 4부를 만들겠다고 약속하였다. 또 1148년에는 최단(崔端)의 딸 장선왕후(莊宣王后)를 왕비로 맞아들였다. 당시 왕실은 다처(多妻)를 취하였기에 일상적인 일이었으며, 이 역시 후사를 많이 두기 위함이었다 할 수 있다.

장경왕후는 1151년 흥덕궁주(興德宮主)로 책봉되었으며, 1153년에는 아들이 왕태자로 책봉되었다. 왕후에게는 세 딸도 있었는데, 1157년에 각각 경덕궁주(敬德宮主), 안정궁주(安貞宮主), 화순궁주(和順宮主)로 책봉되었다. 맏딸은 1162년에 왕평(王評)과, 둘째딸은 1163년에 함녕백(咸寧伯) 왕박(王璞)과, 셋째딸은 연도는 확실치 않으나 광릉후(廣陵侯) 왕면(王沔)과 혼인하였다. 1168년에는 강양백(江陽伯) 왕감(王瑊)의 딸로 태자비(太子妃)를 삼아 드디어 며느리까지 보았다.

이때까지 장경왕후의 삶은 평화로움 그 자체였다. 제2비가 있었지만 신료의 딸인 데다가 자식도 없어 적수가 되지 못했다. 남편이 사랑하는 미모의 후궁 무비(無比)도 있었지만 천인 출신이라 그녀와는 지위가 하늘과 땅 차이였다. 이대로라면 남편 사후 태자가 왕위에 오르고, 그녀는 태후가 될 것이었다.

그러나 예기치 않게 불행이 닥쳐왔다. 1170년 무신란이 일어난 것이다. 의종과 태자는 거제현과 진도현으로 각각 추방되었다. 3년 뒤 남편은 이의민(李義旼)에 의해 잔인하게 시해되었다. 태자도 아마 죽임을 당했을 것으로 보인다. 장경왕후는 기록이 없어 생사 여부를 알 수 없지만, 설사 살아 있었어도 심한 고통 속에 날을 보냈을 것이다.

장경왕후는 고려시대 가장 귀한 여성 중의 한 명이었다. 왕가의 여성으로 태어나 태자비가 되고, 왕비가 되고, 태자를 낳았다. 남편은 24년간이나 재위했다. 그러나 행복은 끝까지 이어지지 못했다. 쿠데타로 남편이 쫓겨나고 아들도 추방되었다. 흥미로운 것은 그녀와 여동생 두 명이 모두 인종의 아들과 혼인했다는 점이다. 무신란이 터지면서 그녀의 남편 의종이 죽고, 여동생[광정태후(光靖太后)]의 남편인 명종이 즉위했다. 이후 다시 명종이 최충헌(崔忠獻)에 의해 쫓겨나고 여동생[선정왕후(宣靖王后)]의 남편인 신종이 왕위에 올랐다. 장경왕후의 세 자매를 통해 무신란이라는 역사의 소용돌이 속의 여성을 본다.

공동기획: 이투데이, (사)역사 여성 미래, 여성사박물관건립추진협의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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