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일간신문 최초의 전문 女기자
최은희(崔恩喜·1904~1984)는 1904년 황해도 연백 배천(白川)의 개화 교육자 집안의 5남 5녀 중 5녀로 태어났다. 해주 의정여학교를 졸업하고 경성여자고등보통학교에 진학했다. 3학년 때 3·1운동이 일어나자 만세 시위를 주도했다가 구류 처분을 받았다. 24일 만에 풀려난 뒤 다시 황해도 연백에서 만세시위를 주동했다. 해주지방법원에서 6개월 징역, 2개월 집행유예를 받았다.
안주 유신여학교 교사를 거쳐 일본 도쿄로 유학, 1922년 3월에 닛신(日進)영어학교를 졸업하였다. 황신덕, 박순천, 이현경 등과 함께 니혼(日本)여자대학에서 수학하였는데, 사회사업학부 3학년 때 춘원 이광수의 추천으로 조선일보에 입사하였다. 8년 재직하는 동안 정치부, 사회부, 학예부를 두루 거치며 전문기자로 능력을 발휘하였다.
부인견학단을 조직, 인솔하는 한편 가정란을 신설해 ‘첫 길에 앞장선 이들’을 연재하는 등 여성의 사회화에 힘쓰며, 적극적으로 여성 기자의 영역을 개척하였다. 일본 와세다(早稻田)대학교 법과 2년을 수료하고, 1927년 유영준, 황신덕과 함께 근우회 발기인 및 창립준비위원으로 동회를 조직하였으며, 숙명여고보의 동맹휴학을 지원하여 학교 당국을 규탄하는 성명서를 발표했다. 또한 전문직 여성단체 망월구락부를 재출범시키는 등 사회 활동에도 힘썼으나 근우회 해체 이후에는 단체 활동에 참여하지 않았다.
1930년 7월 니혼대학 법과 출신의 이석영(李錫泳)과 결혼한 뒤 1932년 병이 들어 신문사도 그만두고 활동을 거의 하지 않았다. 남편의 적극적인 보호 아래 사회 활동을 피한 덕분에 친일 활동도 비켜갈 수 있었다. 1942년 남편이 병사하자, 1남 2녀의 어머니로 가장이 되어 삯바느질과 우표 가게 등으로 자녀 교육에 헌신했다.
1945년 광복 후 최은희는 사회 활동을 재개하였다. ‘여학교 교장은 여자로’ 운동부터 1948년에는 자유당 산하 여성단체를 대한부인회로 통합, 서울시 부회장을 맡았다. 1952년 12월에는 대한여자국민당에 들어가 임영신과 함께 중추적 역할을 했는데, 기자 경력을 살려 각종 성명서나 문서 작성을 전담하였다. 그 밖에도 국방부녀회 창설위원, 여성단체총협의회 문화부장 등을 역임하며, 5월 ‘한국의 어머니날’ 제안도 하였다. 1961년 5·16 후에는 재건국민운동본부 중앙위원 등 사회단체의 여성 대표로 참여했다.
특기할 일은 그의 저술 활동이다. ‘씨 뿌리는 여인’, ‘조국을 찾기까지:1905년~1945년 한국여성활동비화’ 등을 출간하였으며, ‘여성전진 70년-초대 여기자의 회고’ 등 그의 수많은 저서들이 근대 여성사 연구의 견고한 디딤돌이 되고 있다. 1984년 별세 후 조선일보사는 그의 유지에 따라 ‘최은희 여기자상’을 제정, 후배 여기자들을 격려하고 있다. 1992년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공동기획: 이투데이, (사)역사 여성 미래, 여성사박물관건립추진협의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