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들 왕위계승 실패…폐위 당한 고려 왕비
경창궁주(慶昌宮主) 유(柳)씨는 고려 제24대 왕인 원종(1219~1274)의 제2비이다. 아버지는 종친인 신안공 왕전(新安公 王佺)이며, 어머니는 희종(熙宗)의 딸인 가순궁주(嘉順宮主)이다. 1244년(고종 31) 원종이 태자였던 시절 태자비로 간택되었다.
원종은 1235년(고종 22) 태자로 책봉되어, 그해 최이(崔怡)의 외손녀인 김약선(金若先)의 딸[사후 순경태후(順敬太后)로 추존]을 태자비로 맞아들인 바 있다. 그러나 태자비가 1237년 아들 왕심(王諶, 뒤에 충렬왕)을 낳고 사망하자 1244년 다시 경창궁주를 태자비로 들인 것이다. 1260년 원종이 즉위하자 경창궁주는 왕후가 되었다. 궁주는 시양후(始陽侯) 왕대(王?), 순안공 왕종(順安公 王悰), 경안궁주(慶安宮主), 함녕궁주(咸寧宮主) 등 2남 2녀를 낳았는데, 시양후는 126006년 이른 나이에 사망했다.
1260년(원종 1)에 원종이 맏아들인 충렬왕을 태자로 책봉하려 하자 경창궁주는 “원종이 태자로서 몽골에 갔다가 부왕(고종)이 죽어 귀국하려 했을 때, 태손(太孫·충렬왕)이 그 소식을 듣고 기뻐하지 않았다. 또 태자는 왕위 계승자인데 권신의 조카를 세울 필요가 있느냐”며 참소했다. 경창궁주의 의도는 당연히 자기의 아들로 왕위를 잇고자 함이었다.
신하들이 적극적으로 간하여 충렬왕은 태자 책봉을 받을 수 있었다. 1263년 왕종은 후(侯)로 책봉되었다가 뒤에 공(公)으로 승진하였다. 충렬왕은 원나라에서 숙위(宿衛)하다가 1271년 원 세조의 딸인 제국대장공주와 혼인하였으며, 1274년 원종이 별세하자 귀국하여 즉위하였다.
1277년(충렬왕 3) 드디어 일이 벌어졌다. 경창궁주가 왕을 저주하였다는 무고(誣告)에 걸려 폐위당하고 서민이 된 것이다. 일의 전말은 이러하다. 왕종은 평소에 병이 많았다. 궁주는 장님인 승려 종동(終同)을 불러 액을 물리칠 방법을 묻고는 기도를 한 후 그 음식을 땅에 묻었다. 환관인 양선(梁善), 대수장(大守莊) 등이 “경창궁주가 아들 왕종과 더불어 임금을 저주하며, 왕종으로 하여금 공주에게 장가들고 왕이 되도록 기도하였다”고 무고하였다.
궁주와 왕종, 종동을 국문하였으나 죄를 자복하지 않았다. 재상들은 궁주가 “감히 저주한 것이 아니라 다만 화복(禍福)을 물었을 따름”이라고 하니 석방하자고 하였다. 그러나 왕은 경창궁주를 폐위하여 평민으로 만들고, 왕종과 종동은 섬으로 귀양 보냈다. 또한 궁주와 왕종의 집과 재산을 몰수하였다.
경창궁주 사건은 무고였을까 아니면 아들을 왕위에 올리고 자신도 태후가 되고자 하는 욕심이 있었을까? 조선시대 연산군, 광해군, 인종 모두 어머니가 일찍 죽어 왕위 계승 혹은 왕으로서의 삶이 고단했던 경우이다. 경창궁주 사건은 고려시대 왕위 계승자를 무고한 첫 사례이며, 시간을 초월한 ‘인지상정(人之常情)’이 보인다.
공동기획: 이투데이, (사)역사 여성 미래, 여성사박물관건립추진협의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