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둠 속에 우뚝 솟은 영국 런던의 고층 아파트에서 14일(현지시간) 거대한 화염 기둥이 솟아오르는 영상에 세계가 경악했다. 워싱턴포스트(WP)는 “19, 20세기에나 볼 법한, 아마도 지구촌의 덜 부유한 지역에서 볼 법한 통제 불능의 화염이 불타올랐다”며 “지금은 2017년이고, 최근엔 그런 장면을 본 적이 없다”고 지적했다. 선진국이자 세계적인 금융 허브 런던에서 일어난 참사가 믿기지 않는다는 반응이다.
이날 화재가 일어난 곳은 런던 중심부에서 서쪽으로 자동차로 30분 정도 떨어진 곳에 있는 24층짜리 고층 주택 ‘그렌펠 타워’. 대부분의 사람들이 잠들어 고요하던 새벽 1시께 저층에서 발생한 불길이 건물 전체로 번진 건 순식간이었다. 화재가 발생한 지 10시간이 훌쩍 지났지만 화재 건물의 창문에서는 아직도 검은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으며, 심지어 건물 붕괴까지 우려되는 상황이다.
목격자들에 따르면 화재 당시 창문으로 몸을 내밀고 옷가지를 흔들며 도움을 요청하는 사람과 울부짖는 어린아이의 모습이 보였다. 또한 그 중에는 건물에 매달리거나 뛰어내린 사람도 있었다. 많은 사람들이 도움을 요청했지만 어떻게 할 수가 없었다. 현재까지 사망자는 18명, 부상자는 78명으로 집계됐으나 건물 규모와 구조의 복잡성 때문에 구체적인 사망자 수는 알 수 없다고 한다.
영국은 정부는 이번 화재를 계기로 리모델링한 오래된 고층 주택들을 일제히 점검한다고 14일 발표했다. 테리사 메이 총리는 “(화재로) 배워야 할 교훈이 있다면 배우고 조치를 취할 것”이라고 밝혔다.
화재가 일어난 곳은 1974년에 지어진 24층짜리 건물로 120가구가 입주할 수 있다. 저소득층 전용 공영주택으로 400~600명 가량이 거주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 아파트는 부도로 폐업한 업체가 지난해 1000만 파운드를 들여 대규모 리모델링 공사를 실시했다고 한다. 전문가들은 공사 당시 외벽에 부착한 피복이 이번 화재에서 굴뚝 같은 역할을 해 불길이 고층으로 순식간에 번졌다고 분석하고 있다.
전문가들은 고층 주택의 경우 그 자체가 하나의 마을이라고 할 정도로 많은 주민들이 살고 있어서 전원이 대피하는데에 생각보다 시간이 많이 걸린다고 지적한다. 최근에는 건축 기술 발달로 고층의 타워형 아파트가 늘고 있어 이번 런던 화재에 대한 충격은 이만저만이 아니다. SNS 상에서는 “우리집도 타워형 아파트인데, 불기둥이 된 걸 보고 깜짝 놀랐다. 남의 일이 아니다”라는 글이 많이 올라왔다.
고층 빌딩의 대형 화재는 잊을 만하면 한 번씩 일어난다. 중동 아랍에미리트연합(UAE)의 두바이에서는 지난해 3월 주거용 고층 건물에서 화재가 발생했고, 재작년 2월에도 86층짜리 초고층 아파트에서 화재가 발생해 불이 벽을 타고 수십 층에 걸쳐 타올랐다. 중국 동북부의 랴오닝성 심양에서도 2011년에 호텔과 아파트가 있는 높이 200여m의 고층 빌딩에서 화재가 났으며, 2010년에는 부산의 지상 38층짜리 고층 아파트에서 화재가 발생했다. 일본에서는 1996년에 히로시마시 나카구에 있는 20층 시영주택의 9층에서 난 불이 발코니 아크릴판 등을 타고 최상층인 20층까지 번졌다. 1989년에는 도쿄 고토구의 28층짜리 아파트의 24층에서 불이 나 6명이 부상했다.
하지만 이번 런던 화재는 특수한 경우라고 전문가들은 입을 모은다. 무엇보다 아파트의 경우 주거 단위별로 분리되어 있어서 불이 번지기 어려운 구조인데, 이번에 불이 난 런던 아파트는 건물 전체가 점화됐기 때문이다. 도쿄이과대학의 세키자와 아이 교수는 “영상을 보면 불길이 건물 외벽을 타고 위층으로 번지고 있는데, 저것은 불에 타기 쉬운 자재가 사용됐을 가능성이 있다”고 진단했다. 이어 “해외에서는 외벽에 타기 쉬운 자재가 사용되는 경우가 많으며, 이 때문에 중국과 한국 등에서도 대규모 화재가 발생했다”고 지적했다.
일본에서는 1996년 히로시마 고층 주택 화재를 계기로 외벽에는 난연 자재를 사용하도록 하고 있다. 또한 불꽃과 연기를 막기 위해 방화구획을 설치하거나 스프링클러 설치를 의무화하는 등 다른 나라에 비해 규제가 엄격해 순식간에 불이 번질 위험은 낮다.
우리나라도 높이 약 20m 이상, 층수가 6층 이상인 건물을 고층 건물로 규정하고, 법령에 따라 방화에 대한 다양한 기준을 마련해뒀다. 특히 고층 건물에서는 고가 사다리차가 닿지 않는 등 소방 활동 및 피난이 어렵기 때문에 소방법 시행령에서 6층 이상의 건물은 스프링클러 설치가 의무화되었다. 또한 건축기준법 시행령에서는 11층 이상 부분은 천장이나 벽 등에 사용되는 부재에 따라 100~500평방미터마다 불꽃과 연기를 막는 방화구획을 설치하도록 하고 있다.
이번에 화재가 난 런던 아파트 건물에는 스프링클러조차 설치되지 않아 후진국형 참사라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