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대 3조 원대 기아자동차 통상임금 소송 선고가 하루 앞으로 다가왔다. '신의성실의 원칙'이 소송의 쟁점으로 떠오르면서 법조계에서는 노동 사건에서 신의칙을 신중하게 적용해야 한다는 지적도 나온다.
서울중앙지법 민사41부(재판장 권혁중 부장판사)는 31일 가모 씨 등 기아차 노동자 2만7424명이 회사를 상대로 낸 임금 청구소송의 선고 공판을 연다. 청구 금액은 원금과 이자를 포함해 1조900억여 원이다. 자동차 업계에서는 노조 측이 이길 경우 이어질 소송까지 고려하면 기아차 측이 최대 3조 원을 부담해야 한다고 본다.
'통상임금'이란 연장·야간·휴일수당 등 각종 수당과 퇴직금 기준이 되는 시간급 금액이다. 대법원은 통상임금 기준으로 '고정성·정기성·일률성'을 제시하고 있다. 모든 근로자에게(일률성) 일정한 기간 마다(정기성) 특별한 조건 없이(고정성) 줘야 한다는 것이다. 이번 기아차 소송에서 청구한 급여들도 이 세 가지 요건을 충족한다는 게 법조계 분석이다.
남은 주요 쟁점은 신의칙 적용 여부다. 신의칙이란 '권리의 행사와 의무의 이행은 신의를 좇아 성실히 이행하여야 한다'는 민법상 원칙이다. 상대방의 정당한 이익을 고려하고 신뢰를 저버리지 않도록 행동해야 한다는 것이다. 대법원은 2013년 갑을오토텍 사건 판결에서 "노사 합의로 통상임금에서 빠졌던 정기상여금을 통상임금에 포함했을 때, 회사의 경영상 어려움을 초래하거나 존립을 위태롭게 한다면 신의칙에 어긋난다"고 판단했다. 신의칙을 적용해 기업 경영에 큰 타격을 입을 경우에는 노동자에게 통상임금을 지급하지 않아도 된다고 판단한 셈이다. 노사가 사전에 정기상여금을 통상임금에 포함하지 않겠다는 합의를 했는지도 관건이다.
기아차는 두 달에 한 번 지급되는 정기상여금(기본급의 750%)을 통상임금에 포함하지 않았다. 기아차 노·사는 그동안 단체협약을 통해 정기상여금을 통상임금에 넣지 않았다는 것은 동의한다. 기아차 노조 측은 다만 "임금 협상 시 정기상여금을 통상임금에 넣지 않겠다는 명시적인 합의를 하지 않았다"고 주장한다. 반면 사측은 "암묵적으로 합의한 결과"라고 반박한다. '중대한 경영상 어려움'을 초래하는지에 대해서도 노조 측은 "기아차는 3년째 10조 넘게 벌어들이고 있고, 이 사건 청구금액은 7000억 원 안팎"이라며 "통상임금 소급분을 지급한다고 해서 회사의 존립이 위태로울 정도는 아니다"라고 주장한다. 반면 사측은 "회사가 지급해야 할 금액이 최대 3조 원"이라며 "인건비 상승으로 인한 제품 가격 경쟁력 하락 등으로 경영상 위기가 초래될 것"이라고 맞선다.
하급심 법원에서는 신의칙을 두고 판결이 엇갈린다. 현재 대법원에 계류 중인 현대자동차 통상임금 소송은 1·2심 모두 신의칙을 인정하지 않았다. 당시 항소심 재판부는 "현대차가 추가로 발생한 법정수당 등을 소급해 지급하더라도 중대한 경영상의 위기가 초래되거나 기업의 존립 자체가 위태롭다고 인정하기 어렵다"고 했다.
최근에는 여러 기업이 신의칙을 인정받았다. 광주고법은 18일 금호타이어 통상임금 소송에서 1심과 달리 신의칙을 적용해 회사 측 손을 들어줬다. 2심 재판부는 △노조가 단체협약에서 상여금을 통상임금에서 제외하기로 합의했던 점 △워크아웃 이후 당기순손실이 큰 폭으로 증가한 점 △회사가 추가로 부담할 임금이 노사가 협상 자료로 삼은 가산임금 범위를 초과하는 점 등을 근거로 들었다.
아시아나항공 통상임금 소송 역시 1심은 노조 측의 손을 들어줬으나, 2심은 신의칙을 내세워 결론을 뒤집었다. 항소심 재판부는 "1998년부터 정기상여금을 통상임금의 범위에서 제외하기로 합의했다"라며 "회사가 소속 근로자들에게 상여금과 지연손해금을 지급하면 예측하지 못한 새로운 재정적 부담을 지울 수 있다"고 판단했다. 앞서 1심은 "아시아나항공은 2010년~2012년 당기순이익을 기록했고, 자본금만 8000억 원이 넘는다"라며 신의칙을 인정하지 않았다. 그밖에 현대로템 등은 1심에서, 현대중공업과 한진중공업 등은 2심에서 신의칙을 인정받았다. 한국GM 역시 대법원에서 파기환송돼 신의칙이 적용됐다.
이같은 신의칙 적용을 두고 법조계에서는 신중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강행규정인 근로기준법을 위반했음에도 민법 원리인 신의칙을 적용할 수 있느냐는 것이다. '근로기준법'은 노동자를 보호하기 위한 강행규정이다. 사용자가 이를 위반해서는 안 되고, 노동자 역시 법에 규정된 권리를 포기할 수 없다. 예를 들어 노사가 더 일하겠다고 합의해도 법정 근로시간을 넘기면 무효다. 2013년 당시 대법원 판결 때도 신의칙을 두고 비판의 목소리가 높았다.
A 부장판사는 "민법 원리인 신의칙을 특수성 있는 노동 사건에 적용하기는 어렵다"라며 "노사가 합의한 부분을 깨서는 안 된다는 판단은 가능하지만, 회사의 재정상태까지 고려해야 할지 의문"이라고 했다. 실제로 신의칙은 협상력 있는 노조가 사측과 합의로 정기상여금을 통상임금에 포함하지 않았을 때 주로 받아들여진다.
B 부장판사는 "민법에서도 신의칙은 거의 안 쓰는 원칙"이라며 "법원이 판결을 내리면 노사가 판결에 따라 각자 조율해서 맞춰나갈 수도 있는 부분"이라고 말했다. 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 노동위원장인 김진 변호사도 "강행규정을 위반한 노동 사건에 신의칙을 적용하면 강행규정의 의미가 없다"라며 "다른 강행규정에 대해서는 신의칙을 적용하지 않으면서 사용자와 경제·사회적인 지위 차이가 있는 노동자에게 신의칙을 적용하는 것은 문제"라고 했다.
반면 박지순 고려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민법 원리랑 노동법 원리가 따로 있는게 아니다"라며 "노동 사건에서도 당사자 간 동의와 합의, 의사표시가 똑같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노·사 역시 협의를 통해 계약을 체결한 경우 신의칙으로 보호해야 한다는 것이다.
대법원이 신의칙 적용 기준으로 제시한 '수긍할만한 특별한 사정'이 모호하다는 지적도 나온다. 재판부마다 기업의 재정적인 어려움이 경영상 위기로 이어질지, 그 위기를 근로기준법 위반에도 불구하고 신의칙을 인정할 정도로 볼 것인지 판단이 달라질 수밖에 없는 탓이다. 박 교수는 이에 대해 "'기준'을 만들기 어려운 기준을 대법원이 제시한 점에서 비판의 소지는 있다"면서도 "노동법이 복잡해서 제3자인 법원에 최종 판결을 맡긴 건데 기준이 추상적이라고 비판하긴 어렵다"고 했다. 그는 "법원은 정기상여금을 통상임금에 넣지 않겠다는 노사합의가 있었다는 점과 현재 기업의 지급 능력 등을 갖고 판단할 것"이라고 내다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