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 대학자 뒷바라지한 현모양처
고려 후기의 대학자 이제현(李齊賢·1287~1367)의 아내 권씨(權氏)는 1288년(충렬왕 14) 고려 후기 최고 문벌 중의 하나인 안동 권씨 가문에서 태어났다. 그녀의 혈통은 화려하기 그지없었다. 당대의 대학자이자 최고 관직을 지낸 권부(權溥)와, 재상을 역임한 유승(柳陞)의 딸 사이에서 둘째 딸로 태어났는데, 가문의 화려함은 선대(先代)에 그치지 않았다.
형제자매들도 모두 당대 최고로 출세한 인물들이었다. 남자 형제로는 최고관직을 두루 거친 권준(權準)과 권고(權皐), 충선왕의 양자가 되어 성명을 왕후(王煦)로 개명한 남동생, 최고위직을 맡았다가 훗날 딸이 원나라 황태자비가 되어 국정을 농단했던 권겸(權謙), 출가하여 최고의 승직(僧職)에 오른 종정(宗頂)이 있었다.
자매들도 남자 형제 못지않았다. 언니는 밀직우부대언(密直右副代言·정3품)을 지낸 안유충(安惟忠)의 아내였고, 여동생 둘은 각각 왕족인 순정대군(順正大君)과 회안대군(淮安大君)에게 시집갔다. 이 집안의 화려함에 대해 당대의 기록에서조차 “한 집안에 군(君)으로 봉해진 사람이 아홉 명이나 되니, 옛날에 없던 일이다”라며 감탄할 정도였다.
그녀의 복은 거기에서 끝나지 않았다. 15세 되던 해인 1302년에 한 살 연상의 이제현과 결혼했던 것이다. 당시 이제현 가문은 그리 뛰어난 명문가는 아니었으나, 학자였던 아버지 권부가 사위의 재능을 일찍이 알아채 딸을 시집보냈던 것이다. 권씨가 시집간 지 1년 만에 남편은 17세의 나이로 관계에 진출하였고, 이후 출세의 가도를 걸어 고려 최고의 문장가이자 대학자로 명성을 날리게 된다.
하지만 하늘은 모든 것을 주지 않는 법인가 보다. 그녀의 결혼생활은 겉보기와 달리 그리 순탄하지 않았던 것 같다. 1314년에 남편이 충선왕을 모시고 원에 가게 되었는데, 그녀의 묘지명(墓誌銘)에는 남편이 고려와 원을 오가느라 “집에 머무르지 않은 것이 10여 년이나 되었다”고 전하기 때문이다.
남편 없이 시집에서 3남 4녀를 홀로 키우는 젊은 여인의 삶은 어떠하였겠는가? 그녀에 대해 당대의 기록은 “며느리의 도리를 다하여 시부모 돌아가실 때까지 기쁘게 해드렸다.”, “집안 살림에 관심이 없이 학문에만 전념하는 남편을 대신하여 집안 경제를 돌보았다.”, “바깥채에는 나가지 않고 안채에 있으면서 하루도 길쌈을 하지 않은 날이 없었다”는 내용으로 일관되어 있다. 현모양처의 전형으로 그녀의 일생이 꾸며져 있지만, 진정 행복한 삶을 살았는지는 의문이다.
그녀는 1332년에 45세라는 젊은 나이로 요절하였다. 어버지보다 14년 더 먼저 사망한 것이다. 남편 이제현은 “아, 내가 불행하게도 아내를 갑자기 잃었으나, 돌아보아도 그 영혼을 위로할 길이 없다”며 슬퍼했지만, 곧이어 새 장가를 두 번이나 갔을 뿐만 아니라 첩까지 별도로 두었다. 인생이 무상하다.
공동기획: 이투데이, (사)역사 여성 미래, 여성사박물관건립추진협의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