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 정부가 주창해 온 ‘시장 자율, 시장 주도 구조조정 원칙’은 왜 폐기됐나.”
“문재인 정부의 가계부채 대책에는 당초 공약과 달리 왜 ‘총량관리’가 빠졌나.”
가계부채, 투기, 기업 구조조정 등 문제가 산적한 국내 금융 부문을 바로 세우기 위해 근본적인 원인과 해법을 논의하는 세미나가 지난 22일 열렸다. 김용기 아주대 교수를 비롯해 류영재 서스틴베스트 대표, 정대영 송현경제연구소 소장 등 금융 관련 학계·업계 종사자들이 두루 모인 포용금융연구회가 주도한 두 번째 행사다.
발족식이었던 지난달 세미나에서는 저신용자의 신용회복 등 새 정부의 서민금융 정책에 대한 평가와 함께 금융 전체의 민주화에 대한 화두를 던졌다. 이번 세미나에서는 더 구체적으로 최근 기업 구조조정과 가계부채 문제에 대한 정부의 역할과 해법을 제안했다.
특히 이날 기조연설은 문재인 정부 초대 주미대사로 내정된 조윤제 카이스트 금융전문대학원 초빙교수가 맡았다. 조 교수는 자본통제를 강조한 로널드 맥키넌 스탠포드대 교수의 제자다. 조 교수는 “금융산업은 공공성과 수익성의 조화가 관건”이라며 “금융 산업의 로비와 영향력으로부터 얼마나 중립적 입장에서 정책과 제도를 운영하느냐가 많은 나라들의 당면 과제”라고 지적했다. 포용금융연구회 회장인 김 교수 역시 “구조조정에서 국책은행의 역할을 다시 설정해야 한다”며 “가계부채 부문에서는 다소 급진적으로 보이는 정도의 총량억제 대책이 나와야 할 때”라고 밝혔다.
◇‘시장 주도’ 구조조정 왜 문제였나…산업정책 ‘부재’ = 이날 ‘산업 및 기업구조조정을 위한 생산적 금융의 모습’이라는 주제로 첫 번째 발표를 맡은 정승일 새사연 이사는 해운업과 조선업 구조조정 과정에서 나타난 과거 정부의 갈지자 행보를 비판했다. 박근혜 정부의 금융위원회는 2014년부터 산업은행 등 국책은행의 개입을 최소화하고 사모펀드(PEF) 산업을 육성해 구조조정 주역으로 삼는 정책을 펴 왔다. 임종룡 전 금융위원장이 취임 이후 지속적으로 주창한 ‘시장 자율’, ‘시장 주도’ 구조조정 정책이다.
그러나 지난해 8월 30일 한진해운이 법정관리에 들어가면서 수출 물류시장에 혼란이 발생하고 비난 여론이 커지자 정부의 정책 방향이 돌아서기 시작했다. 지난해 10월 31일 발표된 ‘조선업 및 해운업 구조조정 정책’에서는 그간 해당 산업이 국제적 비교우위를 상실한 구조적 사양산업이라는 대전제가 폐기됐다. 이에 정부는 기존 시장 주도 원칙과 반대로 산업은행 등 정부의 적극적인 개입과 조정을 통해 해당 산업을 소생시킬 수 있고 살릴 가치가 있다는 논리를 새로 폈다.
정 이사는 “조선·해운·철강 등 여러 부문의 경영위기의 본질을 전문적으로 평가할 시스템과 인력이 없는 상태에서 일방적으로 ‘사양산업 내 좀비기업’으로 매도하는 시장자유주의 이데올로기적 공세에 구조조정 정책이 노출된 것”이라고 말했다. 한진해운에 데인 정부가 대우조선해양 구제금융에서는 정 반대 행보를 보인 배경이다.
정 이사는 “문재인 정부가 위기(징후) 산업에 대한 구체적인 이해를 가지고 있지 않다면 이러한 갈지자 행보는 또 반복될 것”이라며 “국가적 차원의 산업 고도화 전략을 준비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국가적 차원의 주력 제조업 고도화 전략이 취약한 원인으로는 1998년 이후 산업정책이 연구·개발(R&D)과 중소벤처 위주로만 흘러온 점을 짚었다. 산업별로 대기업을 키우는 ‘선택과 집중’ 방식이 1997년 아시아 금융위기를 촉발했다는 반성이 경제정책 결정자들의 사고를 지배하면서 이후 금융정책은 산업이 아닌 혁신정책, 기술정책에 주력하게 됐다는 것이다. 실제 독일의 히든챔피언 기업들이 현장 중심의 숙련노동력을 핵심으로 하는 데 비해 국내 히든챔피업 관련 정부사업은 매출액 대비 R&D를 중시하는 상황이다.
정 이사는 “지난 20년간 상대적으로 R&D 비중이 높지 않은 주력 제조업에 대한 국가적 연구와 인프라가 부족하게 됐다”며 “박근혜 정부가 해운업과 조선업을 구조적 사양산업으로 예단한 것도 이러한 맥락”이라고 설명했다.
이에 기업 구조조정의 새로운 대안으로는 현재 기술혁신 중심의 산학연 네트워크와 금융을 산업 중심 관계금융으로 바꿔야 한다는 점이 제시됐다. 토론자로 나선 조영철 고려대 경제학과 초빙교수는 산업 중심 관계금융에서도 정책금융기관의 역할이 가장 크다고 강조했다.
조 교수는 “정부가 육성하는 신성장 산업이라도 산업은행이 재벌 대기업에 직접 자금을 지원할 필요가 있는지 별도의 논의가 필요하다”며 “정책금융기관이 정부 정책을 지원하되 타당성과 회수가능성을 고려하지 않으면 ‘관치금융’에 불과하다”고 지적했다.
실제 한국개발연구원이 2015년 발표한 ‘부실 대기업 구조조정에 국책은행이 미치는 영향’ 연구에 따르면 국책은행은 민간은행보다 한계기업을 인식하는 시기가 평균 1.3년 늦었다. 특히 대우조선해양을 비롯해 감독해야 할 자회사에 정부의 낙하산 인사가 지배하는 등 도덕적 해이로 감독이 사실상 이뤄지지 않는 문제도 컸다.
조 교수는 “산업은행의 자회사 매각을 서두르고 퇴직자를 임원으로 보내는 관행을 철폐해야 한다”며 “은행의 독과점 체계를 허무는 것 역시 중소기업이 금융에 구속되는 문제를 개선할 수 있다”고 말했다. 지방자체단체와 지방은행, 지역 중소기업의 긴밀한 협력이 구조조정과 성장의 돌파구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가계부채 근본적 대안 없으면 금융위기 현실화 ‘우려’ = 원칙이 무너진 기업 구조조정과 함께 금융위기를 현실화시킬 문제로 가계부채 대책 지연 상황도 지적됐다. 이날 세미나 서두에서부터 김용기 교수는 “대선공약과 ‘국정 100대 과제’에 선정된 ‘가계부채 총량관리’ 정책이 아직 실행되지 못하는 것은 금융사의 수익성 추구 욕구를 거스르지 못하는 것 때문”이라고 강하게 비판했다.
실제 가계부채가 800조 원을 넘어선 2011년 이후 정부 차원의 종합 대책이 계속 마련돼 왔지만 부채 총량은 꾸준히 증가하고 있다. 올해 3월 기준 가계부채는 1400조 원 규모로 국내총생산(GDP)의 193%에 달하는 상황이다. 지난해 말 기준 가처분소득 대비 부채비율은 178.9%에 이른다.
이날 가계부채 관련 발표를 맡은 구기동 신구대 교수는 “그간 민간 금융사들은 가계 대출 규제에 대한 풍선효과만을 주장해 왔고 정부 역시 가계부채 부실화는 최저소득층인 소득 1·2분위에 한정된 문제라는 안일한 인식이 있었다”고 지적했다. 이에 취약계층에 대한 대출은 억제됐지만 재건축 집단대출이나 투기적 다가구에 대한 대출은 확대돼 가계부채 증가세를 잡지 못했다는 것이다.
구 교수는 “금융기관과 정부, 다주택자들의 안일한 인식과는 달리 금융위기 발생 가능성은 현실적으로 존재한다”며 “현재 총부채원리금상환비율(DSR)을 고려하면 금융위기가 발생하지 않는 것이 오히려 이상할 지경”이라고 밝혔다. 현재 소득 1분위와 2분위의 DSR은 41.6%, 40.9%이며 4분위와 5분위마저 30%를 넘는다. 국제결제은행(BIS)은 DSR 20~25% 이상이면 국가의 금융위기 가능성이 매우 크고 30% 이상이면 사실상 부실화됐다고 판단하고 있다.
이날 포용금융연구회는 가계부채 문제를 해결할 구체적인 대안으로 △가계부채 총량관리 정책 △가계부채 해결 컨트롤 타워 △가계부채 탕감 정책을 제시했다. 구 교수는 “정부와 한국은행, 금융감독원 등이 참여하는 공적부채해결기구가 설립돼야 한다”며 “한국자산관리공사나 주택금융공사의 역할을 확대해 채권·리스크 관리 영역을 확대해야 한다”고 말했다. 국민행복기금이 보유한 20조7000억 원의 채권은 즉시 탕감할 수 있다고 분석했다.
이외에도 토론을 통해 민간 영역의 가계부채 상담 전문조직 설립에 대한 의견도 나왔다. 김희철 희망을만드는사람들 대표는 “가계부채 총량제나 DSR 중심 대책이 도입되면 대출 대상자의 양극화가 우려된다”며 “민간 조직에 대한 지원도 강화해 부채해결 프로그램을 다양화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