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색 저널리즘 비판한 신여성 기자
송계월(宋桂月)은 1911년 12월 10일 함남 북청군 신창면에서 태어났다. 아이가 오래 살지 못하겠다는 주변의 말에 어머니가 천한 이름을 짓는다고 계월이가 됐다고 한다.
송계월은 어렸을 때부터 어부이자 신창지역 사회운동단체 소속이었던 아버지 송치옥(宋治玉)의 영향으로 사상 방면의 책과 사회과학 서적을 탐독했다. 신창 지역의 3·1운동을 이끌었던 신창공립보통학교 은사 김용식(金龍植) 또한 송계월의 의식 형성에 깊은 영향을 주었다.
송계월은 15세 때 “서울에 대한 동경심과 더 배우겠다는 향학열”을 안고 홀로 서울에 와서 1927년 4월 경성여자상업학교에 입학했다. 재학 중 학교의 불법 행위에 대항하여 세 차례 동맹휴교를 주도하고 구류 처분을 받기도 하였다.
1930년에는 종로구 가회동 소재 하숙집을 항일학생 대표자들의 회합장소로 제공하고 1월 15일의 서울여학생 만세운동을 이끌었다. 이때 보안법 위반으로 검거되어 2개월가량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된 끝에 1930년 3월 징역 6월, 집행유예 2년 선고를 받았다.
졸업 직후인 1931년 2월, 송계월은 조지아(丁子屋) 백화점(현 을지로 롯데영플라자 자리) 점원으로 취직했다. 당시 백화점 점원은 ‘데파트 걸’로 불리면서 신여성의 하나의 사회 진출 방식으로 인식되고 있었다.
2개월 뒤인 4월에는 개벽사(開闢社)의 제의를 받고 회사 내의 유일한 여성기자로서 잡지 ‘신여성(新女性)’의 기자가 되었다. 첫 기사는 송적성(宋赤城)이라는 필명으로 1931년 4월 ‘신여성’에 실은 ‘내가 신여성이기 때문에’였다. 송계월은 이 글에서 진정한 신여성이란 “개성의 자각과 사회의식을 가지고 가정부인과 노동 여성에 대한 책임감을 가져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평소 자랑스러워하던 대로 “높은 교육열”과 “노동을 통한 경제적 독립” 의식을 지닌 함경도 여자답게 송계월은 열정적인 글쓰기를 통해 자본주의 및 가부장제 사회의 모순을 비판하고자 했다. 1931년 12월 ‘신여성’지에 실은 ‘공장소식’이라는 글에서는 열악한 노동환경과 감독의 성폭력 위협에 시달리는 제사(製絲) 공장 여성 노동자들의 현실을 고발하기도 했다.
송계월이 죽을 때까지 자신을 괴롭히던 악소문(demagogy)을 들은 것은 수감생활 중 얻은 위병과 폐병을 치료하기 위해 고향에 가서 요양 중이던 1932년 5월의 일이었다. 송계월이 ‘처녀출산’을 했다는 가짜뉴스가 퍼지는가 하더니 그해 가을, 공개된 지면인 잡지 ‘여인’의 가십난에 실리기까지 했다. 송계월은 ‘가십난’을 통해 이윤을 좇는 황색 저널리즘을 비판하면서 저널리즘의 윤리적 책임을 제기하고 신여성을 괴롭히는 소문을 정치학으로 쟁점화하고자 하였다. 그러다가 1933년 5월 31일 고향에서 장결핵으로 사망했다. 23세, 너무 이른 죽음이었다.
공동기획: 이투데이, (사)역사 여성 미래, 여성사박물관건립추진협의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