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기 때마다 자구책 모색보다는 일자리 볼모로 정부 지원에 의존
배리 앵글 GM 총괄 부사장 겸 해외사업부문 사장은 지난 1월 한국을 방문, 정부 관계자들과 한국GM의 미래를 논의하기 위한 일련의 회동을 가졌다. 소식통들에 따르면 양측은 한국GM의 문제에 관해 적극 협력하기로 합의했다.
이후 앵글은 이달 초 다시 방한해 한국GM 지분 17%를 소유한 한국산업은행 임원들과 회동했다. 산업은행은 당시 새로운 자금을 투입하기 전 감사를 제안한 것으로 전해졌다.
우리정부와 산업은행은 비록 더디지만 문제 해결에 진전을 이루고 있다고 확신하는 분위기였다. 그러나 GM은 이런 희망적인 무드에 찬물을 끼얹었다. 13일 오전, 2000명을 고용하고 있는 군산공장을 폐쇄하고 나머지 3개 공장에 대해서도 수주 안에 운명을 결정할 것이라고 전격 발표한 것이다.
익명을 요구한 우리정부 관계자는 로이터통신과의 인터뷰에서 “GM은 어려운 상황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우리에게 도움을 요청하면서도 폐쇄에 관해선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며 “그 발표는 충격이었다”고 토로했다.
GM과 우리정부 간 의사소통 부족과 의견 불일치는 앞으로 협상이 더 어려워질 것임을 시사한다. 우리정부는 혈세로 민간기업을 지원한다는 비판을 피하면서도 일자리 유지에 필수적인 제조업을 살려야 하는 상황인데, GM이 일언반구도 없이 뒤통수를 친 셈이다.
더 큰 괘씸죄에 해당하는 건 GM의 무성의한 태도다. 우리정부 관계자들에 따르면 GM은 군산공장 폐쇄 발표 전날 저녁에 이를 전화로 통보했다. 한 소식통은 “정부 내에서 GM에 대한 뿌리깊은 불신이 자리 잡고 있다”며 “이미 오래 전에 신뢰가 무너졌다”고 지적했다. 산업은행은 한국GM이 재무적인 문제와 관련해 정보를 충분하게 공유하고 있지 않다고 비판했다.
발표 시점도 최악이었다. GM은 설 연휴를 앞두고 수많은 근로자의 밥줄이 달린 결정을 내놓은 것이었기 때문이다. 우리정부는 평창동계올림픽을 개최하면서 북한과의 긴장 완화에 주력하던 시점이었다. 이에 GM이 일자리 창출을 최우선 순위로 두는 문재인 정부에 대한 압력을 극대화하려 한다는 추측도 나오고 있다.
여기에 GM은 트럼프의 미국우선주의도 교묘하게 이용하고 있다는 평가다. GM의 군산공장 폐쇄 소식을 접한 트럼프는 “자신의 성과”라고 자찬하면서 GM이 디트로이트로 돌아올 것이라고 선전했다. 한 소식통은 “트럼프가 GM에 생산라인을 미국으로 옮기라고 압력을 넣고 있다”며 “GM은 제너럴모터스가 아니라 거버먼트 모터스”라고 비꼬았다.
GM이 방만한 경영에서 비롯된 실책을 반성하지 않고 정부 지원으로 연명하려 하는 것은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GM은 글로벌 금융위기 여파로 2009년 파산보호를 신청하면서 미국 정부로부터 막대한 지원을 받아 사실상 국영기업이 됐었다. 당시 버락 오바마 행정부는 GM 지분의 약 70%를 확보했다. 이에 ‘거버먼트 모터스’라는 불명예스러운 꼬리표가 붙었다.
밑빠진 독에 물붓기식 GM 지원에 “혈세 낭비”라는 비판도 거셌다. 미국 1위라는 지위를 남용, 퇴직자들에게 막대한 건강보험과 연금 등 파격적인 혜택을 주는 한편 혁신은 등한시해 금융위기 직격탄을 맞을 수밖에 없었는데, 이에 대한 책임을 제대로 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호주 정부 역시 GM으로부터 철저한 배신을 당했다. GM은 호주 정부로부터 12년간 21억7000만 달러(약 2조3173억 원)를 받았으나 정부가 보조금을 끊자 2013년 12월 전격적으로 현지 철수를 결정했다. GM 호주 자회사인 홀덴의 엘리자베스 공장이 지난해 12월 공식적으로 문을 닫으면서 호주는 자동차 생산 100년 역사가 씁쓸하게 막을 내리게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