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론인, 전 코스카저널 논설주간
연분홍빛 파카를 입은 대여섯 살짜리 딸에게 “우리 조금만 더 걷다가 저기 백화점 가서 맛있는 거 사먹자”고 다정하게 말하는 행복한 가장이 있었다. 그들 앞에는 여동생을 킥보드에 태우고는 내리막길을 쏜살처럼 밀고 가는 초등학생 저학년 오빠가 있었다. 아이들 아빠가 대견한 표정 반, 걱정스런 표정 반으로 아이들 뒤를 쫓아가고 있었다. 또 그 뒤엔 봄볕에 달아올라 뺨이 발그스레한 그의 아내가 아이들 겉옷을 든 채 아들더러 “조심해!”라고 소리치며 따라가고 있었다.
아이들의 얼굴에서, 몸짓에서, 까르륵 웃음소리에서, 엄마 아빠를 부르는 소리에서, 칭얼대는 소리에서 봄을 느끼고 생명을 느끼며, 아직은 아이들을 많이 볼 수 있는 동네에 살고 있음에 고마움을 느끼며 집으로 돌아왔다.
TV를 켰다. 보통 땐 잘 안 보던 영상을 왠지 이날은 끝까지 보게 됐다. 상고머리를 한 사내아이가 “다 추워요. 다 얼었어요. 한번 가보세요”라고 말하고 있었다. 화면이 바뀌어 초라한 행색의 할머니 한 분이 나오고, 남루하고 추워 보이는 방이 보였다. 내레이터가 말한다. “올해 아홉 살인 영호는 병든 할머니와 온기 없는 단칸방에서 단 둘이 살고 있습니다.….”
불우어린이를 도와달라는 공익광고다. 계속된 내레이션 내용은 이랬다. “아빠 없이 영호와 영희, 남매를 키우던 영호 엄마도 집을 나갔다. 어린 것 둘을 맡은 할머니는 몸이 약하고 경제적인 능력도 안 돼서 영희를 갓난아기 때 영아원에 맡겼다. 영호네 방은 몹시도 추웠던 지난겨울에도 난방이 안 됐다.”
영호의 목소리가 다시 나온다. “영희가 안됐어요. 내가 없었더라면 영희가 할머니랑 살았을 텐데…. 영희를 생각하면 가슴에 독침을 1초에 9번쯤 찌르는 느낌이에요. … ….” 영호의 목소리 사이로 할머니가 눈물을 훔쳤다. 다시 내레이션. “월 3만 원이면 영호 같은 어린이들을 도울 수 있습니다. 여러분의 관심이 필요합니다. … ….”
영호의 고달픈 삶을 소개한 공익광고 바로 뒤에는 어린이 유산균 광고가 나왔다. 예쁘고 날씬한 유명 여자 배우가 화려하고 널찍한 거실에서 포동포동 귀여운 아기를 안고 “아이들을 건강하게 잘 키우려면 어릴 때부터 이 유산균을 꼭 먹여야 한다”고 웃으면서 말하고 있었다.
채널을 바꿨더니 여러 방송이 연예인들과 그 가족들이 출연하는 ‘인생맛집’, ‘인생여행’, ‘인생주점’을 소개하고 있었다. “이 요리는 평생 한 번은 먹어봐야 합니다.” “거기는 꼭 가보셔야 합니다. 지금 아니면 언제 또 가보겠어요.” “내가 여태 이 술집에만 오는 이유는 안주가 정말 죽이거든요.” 화려한 화면에 이런 멘트가 이어졌다. 채널을 또 바꿨더니 “아프리카 어린이들이 깨끗한 물을 먹지 못해 1년에 1400명이 죽는다. 1만 원씩 모아서 이들에게 물을 먹이자”는 내용의 공익광고가 비쳤다.
‘서리를 맞는 아이가 너무 많구나 …’, 잠깐 걱정을 해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