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종진의 만년필 이야기] 11. 퀸 메리의 인형의 집

입력 2018-03-09 14: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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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대왕(1397~1450). 우리나라에서 역사 연구를 하는 사람들이 하는 말은 “무엇을 연구하든 어디를 연구하든 세종대왕에 닿는다”는 것이다. 나는 역사 전문가는 아니지만 최근 종이를 연구하면서 이 말을 실감했다.

우리나라 종이 한지(韓紙)는 조선 초 질과 양 면에서 세계 최고였는데 이 역시 세종대왕의 적극적 관심이 그 바탕이 되었다. 일본에 사람을 보내 우리나라에 없는 새로운 품종 닥나무를 가져와 바닷가에 심기도 했고, ‘자치통감(資治通鑑)’을 인쇄할 때는 귀한 재료인 닥나무에 구하기 쉬운 보리 짚, 대나무껍질 등을 얼마만큼 섞어야 하는가에 대한 구체적 비율까지 몸소 제시했다. 종이까지 그러니 또 어디에서 세종대왕을 만날지 알 수 없는 일이다.

수집의 세계에도 자주 만나는 인물이 있다. 제1차 세계대전 당시 영국 왕이었던 조지5세(1865~1936)의 왕비 메리이다. 메리 왕비는 보석과 골동품의 열렬한 수집가로 알려졌는데, 필기구에 그녀와 관련된 것들이 꽤 있다. 베르사이유 조약의 서명에 사용된 금으로 만들어진 만년필의 복제품이 그녀에게 증정(贈呈)되었다. 1차 세계대전 당시인 1914년 전선에 보낸 왕실 위문품에 포함된 그녀의 문장(紋章)이 새겨진 탄피 모양의 연필은 수집가들의 필수 수집 품목이 된 지 오래이다.

2월 24일자 글 ‘수집의 요령’에 소개한 성냥보다 작은 만년필도 그녀와 직·간접적 관련이 있다. 길이가 불과 4.2cm인 이 만년필은 실제로 잉크를 넣어 글씨를 쓸 수 있지만 공식 라인으로 만든 것이 아니어서 정식 이름은 없다. ‘세상에서 가장 작은 만년필’, ‘인형의 펜’으로 불린다.

세상에서 가장 작다고 하는 것은 이해되지만 인형의 펜이라고 하는 이유는 뭘까? 이 부분이 메리 왕비와 관련이 있다. 영국 윈저성에는 ‘퀸 메리의 인형의 집’이 있다. 실제의 12분의 1 크기로 지은 저택인데 서재와 식당, 침실 등이 아주 정교하게 만들어졌고 책을 꺼내 펼쳐 보면 글씨가 인쇄되어 읽을 수 있다.

▲‘퀸 메리의 인형의 집’. 실물의 12분의 1크기다.(출처 위키디피아)
1920년에 만들기 시작해 1924년 완성된 이 인형의 집에는 1925년 자선기금 마련을 위해 일반에 공개된 이후 160만여 명이 다녀갔다고 한다. 이 세상에서 가장 작은 만년필이 인형의 집에 들어 있던 것일까? 만년필의 수집을 다루는 수많은 자료에 그렇게 기술돼 있지만 그것은 오류(誤謬)이다. 두 가지 측면에서 맞지 않는다. 첫째, ‘퀸 메리의 인형의 집’에 들어가 있는 것들은 대부분 영국산이다. 그런데 세상에서 가장 작은 만년필은 워터맨사가 만든 것으로 미국산이다. 영국에 만년필 회사가 없다면 몰라도 있는데 굳이 미국산을 넣을 필요는 없다.

둘째, 4.2cm라는 길이 문제다. 인형의 집과 거기에 들어가는 물품은 모두 12분의 1로 축소된 것이다. 4.2cm는 너무 길다. 이에 12를 곱하면 약 50cm인데 실제 만년필이 길어야 17cm 정도이니 너무 긴 것이다. 즉 1.5cm 이내라야 인형의 집에 들어갈 수 있다.

나도 한동안 세상에서 가장 작은 펜을 인형의 펜이라고 부르고 글도 남겼다. 듣고 싶은 것만 듣고 보고 싶은 것만 보는 것에 나도 갇혀 있었던 건 아닐까? 눈 크게 뜨고 귀 활짝 열고 살아갈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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