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종이 한지(韓紙)는 조선 초 질과 양 면에서 세계 최고였는데 이 역시 세종대왕의 적극적 관심이 그 바탕이 되었다. 일본에 사람을 보내 우리나라에 없는 새로운 품종 닥나무를 가져와 바닷가에 심기도 했고, ‘자치통감(資治通鑑)’을 인쇄할 때는 귀한 재료인 닥나무에 구하기 쉬운 보리 짚, 대나무껍질 등을 얼마만큼 섞어야 하는가에 대한 구체적 비율까지 몸소 제시했다. 종이까지 그러니 또 어디에서 세종대왕을 만날지 알 수 없는 일이다.
수집의 세계에도 자주 만나는 인물이 있다. 제1차 세계대전 당시 영국 왕이었던 조지5세(1865~1936)의 왕비 메리이다. 메리 왕비는 보석과 골동품의 열렬한 수집가로 알려졌는데, 필기구에 그녀와 관련된 것들이 꽤 있다. 베르사이유 조약의 서명에 사용된 금으로 만들어진 만년필의 복제품이 그녀에게 증정(贈呈)되었다. 1차 세계대전 당시인 1914년 전선에 보낸 왕실 위문품에 포함된 그녀의 문장(紋章)이 새겨진 탄피 모양의 연필은 수집가들의 필수 수집 품목이 된 지 오래이다.
2월 24일자 글 ‘수집의 요령’에 소개한 성냥보다 작은 만년필도 그녀와 직·간접적 관련이 있다. 길이가 불과 4.2cm인 이 만년필은 실제로 잉크를 넣어 글씨를 쓸 수 있지만 공식 라인으로 만든 것이 아니어서 정식 이름은 없다. ‘세상에서 가장 작은 만년필’, ‘인형의 펜’으로 불린다.
세상에서 가장 작다고 하는 것은 이해되지만 인형의 펜이라고 하는 이유는 뭘까? 이 부분이 메리 왕비와 관련이 있다. 영국 윈저성에는 ‘퀸 메리의 인형의 집’이 있다. 실제의 12분의 1 크기로 지은 저택인데 서재와 식당, 침실 등이 아주 정교하게 만들어졌고 책을 꺼내 펼쳐 보면 글씨가 인쇄되어 읽을 수 있다.
둘째, 4.2cm라는 길이 문제다. 인형의 집과 거기에 들어가는 물품은 모두 12분의 1로 축소된 것이다. 4.2cm는 너무 길다. 이에 12를 곱하면 약 50cm인데 실제 만년필이 길어야 17cm 정도이니 너무 긴 것이다. 즉 1.5cm 이내라야 인형의 집에 들어갈 수 있다.
나도 한동안 세상에서 가장 작은 펜을 인형의 펜이라고 부르고 글도 남겼다. 듣고 싶은 것만 듣고 보고 싶은 것만 보는 것에 나도 갇혀 있었던 건 아닐까? 눈 크게 뜨고 귀 활짝 열고 살아갈 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