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슈&인물] 김용석 서울행정법원장 “법원은 기업과 국가 사이의 중재자”

입력 2018-04-27 1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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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행정법원 제공)

지방자치단체와 대형마트 간 싸움은 2013년 시작됐다. 지자체가 대형마트 심야 영업을 제한하고 의무휴업일을 정했다. 당장 대형 유통업체들이 반발했다. 롯데쇼핑·이마트·홈플러스 등 6곳은 서울 동대문구청과 성동구청 등 지자체 5곳을 상대로 영업시간 제한 등 처분 취소소송을 냈다.

1심인 서울행정법원은 ‘상생’을 강조한 지자체 손을 들어줬다. 당시 재판부는 “의무적인 영업단축과 휴무를 통해 대형마트 등 소속 근로자 건강을 개선하고, 중소유통업자나 소매상의 매출이나 이익 증가에 도움이 된다”며 “공익 달성에 적절한 방법”이라고 판단했다.

이 사건은 항소심에서 뒤집혔다. 2심 재판부는 “이마트 등은 옛 유통산업발전법 시행령상 대형마트로 볼 수 없다”고 판단했다. 법상 대형마트는 ‘점원의 도움 없이 소매하는 점포의 집단’이다. 이마트 등에서는 점원이 소비자들에게 서비스를 제공해 행정처분 대상이 아니라는 설명이었다. 상생효과보다 소비자 권리 침해 소지가 크다고도 했다.

그러나 대법원 전원합의체는 2015년 1심이 정당하다고 봤고, 이 판결은 확정됐다. 대법원은 이마트를 대형마트로 보고, ‘공익’과 ‘경제민주화’를 근거로 규제 필요성을 강조했다. 이 사건은 행정법원이 개원 20주년을 맞아 선정한 ‘판결 20선’ 가운데 하나다. 법원 서포터즈 20명이 고른 의미 있는 판결들이다.

“결국 핵심은 ‘법치’입니다. 기업이 영업의 자유를 무조건 누리는 게 아니고 법에 맞게 경영해야 합니다. 국가가 기업에 합리적인 제한을 가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다만 기업에 대한 규제와 간섭이 법에 맞게 행사됐는지를 판단하는 곳은 법원입니다.”

최근 서울 서초구 서울행정법원에서 김용석(55·사법연수원 16기) 원장을 만나 개원 20주년 의미와 소감을 들었다.

◇ “기업과 국가 사이에서 ‘중재자’ 역할”

김 원장은 법원이 기업과 국가 사이에 있는 ‘중재자’라고 했다. 기업은 자유롭게 영업할 수 있다. 다만 이는 법 테두리 안에서다. 위법한 행위를 할 때 국가는 행정권을 동원해 기업을 제재한다. 기업은 이 같은 행정처분이 적법한지를 다투기 위해 행정법원을 찾는다.

행정소송은 특히 국가 예산과 밀접하게 관련돼있다. 예를 들어 조세 소송의 경우, 납세자는 우선 세금을 낸 뒤 처분 불복 소송을 시작한다. 국세청이 소송에서 지면 이미 납부된 세금은 물론 이자까지 물어야 한다. 이 때문에 법원이 예산을 걱정해 국가에 유리하게 판단하는 이른바 ‘국고주의’를 취한다는 비판이 꾸준히 나왔다.

김 원장은 그러나 “아무리 금액이 많더라도 법에 맞게 판단해야 한다”며 “국고 손실을 이유로 그 판단을 주저하는 법관은 없을 것”이라고 했다.

◇20주년 맞은 서울행정법원...늘어나는 급부행정

서울행정법원은 행정사건만 다루는 유일한 법원이다. 국가로부터 부당하게 기본권을 침해당한 시민들이 모여든다. 국가에 시민으로서 누릴 수 있는 정당한 권리를 요구하기도 한다. 1998년 출범한 서울행정법원이 올해 20주년을 맞았다.

“20년이면 공자가 말한 ‘약관(弱冠]·남자 나이 20세를 일컫는 말)’이 아니겠습니까. 행정법원이 양적·질적으로 성장해 비로소 궤도에 접어들었다고 생각합니다.”

서울행정법원은 크게 행정처분 취소소송과 부작위위법확인소송을 담당한다. 취소소송이란 행정청의 위법한 처분에 불복해 자신의 권리와 이익을 지키기 위한 소송이다. 부작위위법확인소송은 처분을 할 의무가 있는 행정청이 아무런 조치를 하지 않은 경우 낸다. 예를 들어 장애인 지원을 신청했는데 구청이 응답하지 않으면 이 소송을 낼 수 있다.

현재 서울행정법원에서 근무하는 판사 수는 총 44명(법원장 포함)이다. 조세·노동·산재·토지수용·보건·주민·도시 정비 등 7개 전문분야로 나뉜다. 서울행정법원 판사들은 한 재판부에서 최대 3년 근무할 수 있다. 1년 또는 2년 단위로 재판부가 바뀌는 다른 1심 법원과 달리 같은 재판부에서 전문성을 살릴 수 있다. 이후 다른 법원에서 행정 소송을 담당하다가 다시 서울행정법원으로 오기도 한다. 김 원장은 “서울고법 5개 재판부가 행정소송을 담당하던 20년 전과 달리 행정 전문 판사나 관련 실무자가 많아졌다”며 “그만큼 행정소송 저변이 넓어진 것”이라고 했다.

학계와의 교류도 활발하다. 한국행정법학회와 행정판례연구회 등과 함께 한 달에 한 번 정기 세미나를 연다. 꾸준한 연구로 행정법의 발전을 주도했다.

서울행정법원은 그동안 사회 변화에 맞게 산재 등 여러 분야에서 인정 범위를 넓혀왔다. “기존 판례에서 벗어난 판결이 상급심에서 파기되면 다시 제자리로 돌아오고 인정이 되면 외연이 확대됩니다. 한 번에 판례가 확 바뀔 수 있는 게 아니고 이러한 과정을 반복하면서 인정 범위가 약간씩 넓어질 수 있습니다.” 출퇴근길에 벌어진 사고를 산재로 인정하는 폭이 넓어진 것이 그 예다. 과거에는 통근버스를 탄 노동자가 사고를 당했을 때만 산재로 인정했다. 전문성 있는 판사가 내린 판결이라 신뢰도와 설득력도 높다.

개원 당시 3026건에 불과했던 소송 건수는 지난해 1만870건으로 약 3.6배 증가했다. 이 가운데 난민 소송이 20% 안팎을 차지한다. 최근에는 ‘급부행정’ 분야 소송이 크게 늘었다고 한다. 급부행정이란 국가가 공공복리 증진을 위해 국민에게 재화와 서비스 등을 제공하는 것이다. 장기요양보험 등 복지 혜택이 대표적이다. 김 원장은 “과거에는 국가의 기본권 침해에 대한 소송이었다면 복지국가로 바뀌면서 급부행정이 주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라고 했다.

◇ “의무이행소송 도입 필요...행정처분 의미 확대해야”

김 원장은 ‘의무이행소송’ 제도 도입을 향후 시급한 과제로 꼽았다. 의무이행소송이란 법원이 행정 처분을 취소하면서 판결 취지에 맞는 처분을 다시 내리도록 행정청에 강제하는 제도다. 현행법에서는 원고가 행정 처분 취소 소송에서 이기더라도 행정청이 이를 무시하거나 법원 판결에 부합하지 않는 처분을 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장애인 등록 거부 처분 취소 소송에서 시민이 이기더라도, 구청이 신청을 받아주도록 강제할 방법이 없다. 오히려 부당한 처분을 다시 할 수 있다.

그럼 당사자는 재차 소송을 내 다퉈야 한다. 분쟁이 길어지고 비용도 많이 든다. 의무이행소송을 도입하면 재판 한 번으로 분쟁을 끝낼 수 있다.

김 원장은 “독일, 일본 등에서 도입했고 국내 학계에서도 (의무이행소송을) 대부분 찬성한다”며 “이 제도가 도입되면 불용 절차를 많이 줄일 수 있다”고 했다. 가처분 제도도 마찬가지다. 가처분이란 본안 소송 결과가 나올 때까지 임시 조치를 하는 것이다. 당사자가 소송이 끝나기 전 실질적인 도움을 받을 수 있다.

행정소송 대상이 되는 ‘처분’의 범위를 폭넓게 봐야 한다고도 강조했다. 행정소송법상 처분은 구체적 사실에 대한 법 집행으로, 공권력 행사·거부와 그밖의 행정작용을 의미한다. 대법원은 “행정청이 특정 사항에서 권리 설정이나 의무 부담을 명령하는 등 국민의 권리·의무에 직접 영향을 미치는 행위”라고 본다. 처분 범위가 넓어지면 국민들이 더 쉽게 소송을 낼 수 있다.

김 원장은 “국민 입장에서는 행정처분으로 불이익을 받았다고 생각하는데, 행정처분이 아니라는 이유로 각하(소송 요건을 갖추지 못해 재판을 끝내는 절차)되는 경우가 많다”며 “적어도 소송에서 다투게 해줘야 하는 것 아니냐는 공감대가 형성돼있다”고 했다. 그는 “국민 권리구제를 강화하는 방향으로 나아갈 것”이라고 내다봤다.

“사안에 따라 조금씩 칼끝을 내미는 겁니다. 과감하게 법률을 해석하고 그것을 상급심에서 받아주면 판례로 정착됩니다. 판사는 정의감을 발휘할 필요가 있습니다. 행정법뿐만 아니라 개인 사법과 형사법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기존 판례가 불합리하다는 것이 아니라 사회 발전과 인식 변화에 따라 앞으로의 방향을 제시하는 것이죠”

◆김용석 서울행정법원장은

서울 휘문고와 서울대 법대를 졸업한 뒤 1990년 서울지법 동부지원 판사로 임관했다. 이후 △법원행정처 사법정책담당관 △대법원 재판연구관 △서울중앙지법 부장판사 △부산고법 부장판사 △수원지법 수석부장판사 △서울고법 부장판사 등을 거쳤다. 행정 재판을 맡아 삼성전자 반도체 공장에서 근무하다가 다발성경화증 진단을 받은 근로자를 항소심에서 최초로 산재로 인정했다. 법리에 해박하고 실무에 능통하다는 평가를 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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