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에 걸면 코걸이 귀에 걸면 귀걸이 아닌가요?” 정부가 문재인 대통령 취임 1주년을 맞아 ‘적폐 청산’ 범위를 확대, 기존의 ‘권력형 적폐’뿐만 아니라 ‘생활 적폐’ 청산에도 주력하겠다고 밝히면서 재계가 긴장하고 있다. 정부는 일단 생활 적폐에 대해 ‘채용 비리·학사 비리, 토착 비리, 공적자금 부정수급, 재개발·재건축 비리, 경제적 약자 상대 불공정·갑질행위’ 등의 예를 들었다. 재계가 주목하는 부분은 경제적 약자를 대상으로 하는 갑질과 불공정 행위 등이다. 우선 갑질산업으로 낙인찍힌 프랜차이즈와 재건축 관련 건설업계, 금융권의 채용비리 등이 타깃이 될 것으로 보이지만, 앞으로 생활 적폐의 범위가 어디까지 확장될지는 알 수 없는 탓이다.
16일 대기업 한 관계자는 “생활 적폐란 게 명확하지 않은 상황인데, 앞으로 납품 단가 후려치기 등을 막는다며 대기업 영업이익률과 협력사 영업이익률이 왜 다른지, 원가 등 그 이유를 밝히라고 압박할 수도 있는 일 아니냐”고 토로했다. 최근 슈퍼호황기를 누리고 있는 반도체 업종만 봐도,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는 50%의 영업이익률을 올리고 있지만 협력사는 그 정도까지 이익이 나지 않는다. 이는 기술력과 생산성 등 다양한 차이에 의한 것인데, 이를 대기업이 협력사를 쥐어짜는 생활 적폐로만 판단할 수 있다는 지적이다.
또 최근 고유가 시대가 되면서 주유소 기름값이 오르고 있는데, 정유사에 원가공개를 요구할 수 있다는 관측도 나온다. 2011년 정부는 정유사들에 휘발유 원가 내역 공개를 요구했으나 정유사들의 거센 반발로 무산된 바 있다. 이미 이통사들은 통신 원가를 공개해야 하는 처지다. 지난달 대법원은 국민의 알 권리를 근거로 “통신요금 원가 산정의 근거자료 일부를 공개하라”고 참여연대의 손을 들어줬다. 이통사를 대상으로 추진 중인 보편요금제도 논란거리다. 보편요금제는 공공재 성격인 통신비가 과도하게 부과되는 것은 적폐라며 이통사에 월 2만 원대 요금제를 만들라는 법안이다. 일각에선 그렇다면 자동차도 특정가격대의 특정사양 제품을 만들라고 강요할 수 있는 일 아니냐고 우려한다. 특히 집이야말로 공공재인데 보편요금제를 도입한다면 주택 보편가격제도도 도입해달라는 주장도 나오고 있다.
이 같은 상황에 기업들은 심각한 우려를 표하고 있다. 치열해지는 글로벌 경쟁 환경 속에서 패를 다 보여주고 경쟁해야 하는 상황에 부닥칠 수 있다는 것이다. 재계 관계자는 “생활 적폐 청산을 빌미로 사사건건 정부가 시장경제에 개입한다면 경제가 제대로 돌아가겠느냐”며 불만을 토로했다.
이와 함께 최근 한진그룹 사례가 향후 기업들의 생활 적폐를 구분 짓는데 기준점이 될 가능성이 크다는 분석도 나온다. 이번 사건은 ‘갑질 논란’으로 인해 적폐와 관련된 내용이 내부자들로부터 흘러나왔고, 이는 구체적 증거를 확보할 수 계기가 됐다. 생활 적폐를 청산하기 위한 ‘본보기’로 활용될 수 있는 사례다. 실제로 한진그룹 총수 일가의 갑질과 범법 행위에 대한 당국의 전방위적인 압박은 갈수록 거세진다. 경찰, 관세청, 국토교통부, 고용노동부, 공정거래위원회, 출입국관리 당국에 이어 농림축산검역본부까지 한진그룹 총수 일가와 관련된 각종 의혹을 샅샅이 뒤지고 있다. 여기에 삼성은 말할 것도 없고, 최근 재계 모범생으로 알려진 LG그룹도 탈세 등의 혐의로 수사를 받고 있다.
재계 일각에선 정부의 생활 적폐 청산 선언이 재벌의 ‘소유=경영’ 구조를 바꾸라는 강력한 시그널로 볼 수 있다는 분석을 내놓고 있다. 이에 대해 재계 관계자는 “전문 경영이든 소유 경영이든 장단점이 모두 있고, 어떤 체제가 기업에 적합한지는 그 기업의 실적이 보여주는 것인데, 최근 정부의 액션을 보면 소유와 경영을 분리하라고 압박하는 것으로 보인다”고 지적했다. 전문가들은 생활 적폐의 이런 모호성과 확장성, 기업의 기본적인 영리 활동을 제약하는 반시장성 등 때문에 좀 더 명확한 정의가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재계 관계자는 “문재인 정권의 기본 경제철학은 소득주도 성장론과 분배를 강조하는 마르크스 경제학에서 나왔다”며 “이런 철학에서 기업은 일방적인 희생의 대상이 될 수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