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업금융부 차장
변칙적이고, 전횡적인 인사 개입 행태를 말할 때 주로 쓰이는 말이다. 조선 전기 임금이 벼슬아치로 뽑을 사람의 이름 위에 점을 찍던 행위로 낙점(落點)이 있었다. 인사를 담당한 이조나 병조에서 비삼망(備三望)이라 해서 세 사람을 추천해 올리면 임금은 후보자들의 능력과 인품 등을 고려해 마음에 드는 한 사람의 이름 위에 점을 찍었다.
그러나 왕권이 약했던 단종(端宗) 때는 막강한 인사권을 가진 김종서와 같은 힘 있는 공신들이 임금의 낙점과 같은 행위를 대신했다. 김종서는 임금에게 올린 인사 명단에 황색 점을 찍었다. 단종은 형식적인 결재만 하는 식의 인사였다. 임금이 어린 탓에 모든 인사권에 힘 있는 공신들이 변칙적으로 개입했다.
조선시대를 훌쩍 건너뛴 요즘, 은행권이 최고경영자(CEO)가 연루된 채용 비리로 오뉴월에도 살얼음판을 걷고 있다. 은행마다 "전·현직 CEO들이 연루됐다"는 의혹이 검찰의 수사로 이어지자, 저마다 애써 담담한 표정뿐이다.
앞서 금융감독원은 특별검사에서 국민은행의 경우 '長(장)', KEB하나은행의 경우 '(회)'라는 표시가 기재된 비리로 얼룩진 내부 문건을 발견했다. 금감원은 이들 은행 CEO의 연루 의혹에 대해 신중한 태도를 취했지만, '長(장)','(회)'를 거론한 것만으로도 개입 가능성을 짐작케 한다. 내부 문건에서 확인된 입사 지원자들은 서류전형은 물론 실무면접 점수가 합격 점수에 크게 미달했던 것으로 확인됐다.
결과적으로 '長(장)','(회)'라는 현대판 황표정사로 합격자 명단에 이름을 올린 셈이다. 비록 고관대작(高官大爵)을 발탁하는 황표정사는 아닐지라도 '長(장)','(회)'가 의미하는 것은 인사권을 장악, 안하무인식 권력을 누리는 전횡의 상징이지 싶다.
은행권에서 불거진 일련의 채용 비리를 놓고 보면 신입 행원 채용 과정에 최종 재가권을 들고 있는 건 다름 아닌 CEO이다. 지난해 우리은행 채용 비리 사태의 책임을 지고 이광구 전 행장이 서둘러 물러났던 것도 이 때문이었다. 물론 금감원 고발로 검찰 수사를 받기 시작한 은행들의 채용 비리 혐의점들이 우리은행과 모두 동일한 사안은 아니다. 그러나 자칫하면 CEO 책임론까지 번질 수 있는 문제들이란 점은 마찬가지다.
현재 막판에 접어들었다는 검찰의 수사도 CEO의 연루 가능성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앞서 국민은행의 경우 당시 채용 담당 부행장과 부장, 팀장급 인사 3명이 남녀고용평등법을 위반한 혐의로, KEB하나은행도 부장급 인사 2명이 업무방해 혐의로 기소돼 재판에 넘겨졌다. 그러나 공식적인 수사 결과 발표를 미루고 있는 것은 CEO 연루 혐의를 입증하는 데 수사력을 집중하고 있다는 해석이다. 검찰 역시 '몸통' 빼고 '깃털'만 처벌한다는 지적을 묵과할 수 없을 것이다.
채용 비리는 힘 있는 자와 힘없는 자를 양분하는 반사회적인 범죄다. 일자리에 목매는 청년들의 꿈을 짓밟는 행위로 우리 사회의 공정성에 대한 기본적인 신뢰도 무너뜨린다. 자신이 의중에 둔 사람을 일정한 자리에 앉히려고 압력을 행사하는 것은, 김종서가 복수의 후보 가운데 특정인을 황색으로 표시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
상식의 잣대에 맞춰 진실을 밝히고 책임지는 모습, 황표정사(黃票政事)에 대한 회장님의 시대적인 사명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