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이퀸 대관식이 축제의 시작을 알리는 전초전이었다면 축제의 절정은 단연 쌍쌍파티였다. 텅 비어 있던 운동장을 가득 채운 남녀가 밴드의 생음악(?) 연주에 맞춰 쌍쌍이 춤을 추던 모습은 (다소 부풀려) 영화의 한 장면을 연상시키는 멋진 장관을 연출했고, 어둠이 내린 후 이어지는 촛불파티에선 젊음의 낭만과 사랑의 열정이 솟아올랐다.
축제가 다가오면 너나없이 그날의 파트너를 구하기 위해 동분서주했다. 각자의 소지품을 보고 짝짓기를 하는 ‘신데렐라 미팅’이나 짝짓기에 실패한 남자가 눈물을 머금고 돌아가는 ‘피 보기 미팅’을 거쳐, 축제 날 하루만 파트너 역할을 해줄 상대를 찾는 ‘대일밴드팅’까지 각양각색의 미팅과 소개팅이 이어졌다. “1학년은 풍요 속의 빈곤이요 2학년은 빈익빈 부익부, 3학년은 빈곤의 악순환이요 4학년은 체제 속의 안정”이라는 풍자가 떠돌아다녔고, “혹시나” 하고 갔다 “역시나” 하고 돌아오는 것이 미팅의 정석이라는 농담도 퍼졌다.
예전 이화여대 정문 근처에 자리했던 이화교 아래로는 하루 종일 기차가 지나다녔다. “우연히 기차 꼬리를 밟으면 소원이 이루어진다”는 전설(?)을 순진하게 믿었던 신입생들은 기차 꼬리를 밟기 위해 멀리서부터 온 힘을 다해 달리곤 했다. 갓 스무살 철없던 청춘들의 간절한 소원으로 “첫눈에 반해 사랑에 빠지는 것” 이외에 무엇을 상상할 수 있겠는지. 단 진정한 행운은 그저 우연히 다가오는 것이기에 일부러 뛰어 와 기차 꼬리를 밟는 건 무효라는 이야기에 샐쭉해지기도 했다.
축제가 시작되면 남성 금지구역이었던 교정이 남성들에게 활짝 개방되었다. 내 기억에 5월 30일은 1, 2학년을 위한 축제, 31일은 3, 4학년을 위한 축제로 구분해 진행했는데 티켓 값이 상당히 비쌌던지라 오매불망 축제 초대를 기다린 이웃 학교 남학생들이 하나둘이 아니었다 한다. 얼마 전에도 이화여대 축제에 초대받았던 기억을 떠올리며 황홀해하는 60대 초반의 할아버지를 만났을 정도이니 말해 무엇하리오.
특별히 고학년 축제 날은 정문에 딸린 쪽문만 열어 놓은 채 입장권을 일일이 확인하곤 했는데, 쪽문에서부터 늘어선 줄이 이대입구 전철역을 지나 지금의 웨딩 스트리트까지 이어졌다. 축제를 끝낸 후배들은 길게 늘어선 줄 속에서 선배들을 찾아 파트너 품평회를 열기도 했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그때의 선배들은 결혼 적령기답게 성숙한 아름다움을 유지했던 것 같다. 지금은 대학 4학년을 死학년이라 한다니…
5월이 되자마자 축제팅에 집중적으로 나갔던 내 친구는 똑같은 남자와 무려 세 번이나 파트너가 되는 기이한 경험을 했다. 두 번째 만났을 때까지도 ‘내 짝은 아닌가 보다’ 깔끔하게 결론 지었는데, 세 번째 또 만나고 나니 ‘이건 운명인가 보다’로 선회하게 되어 4년 열애 끝에 결혼식장으로 직진했다. 낭만적 연애조차 포기한다는 젊은이들 눈에 정치적 억압에도 불구하고 낭만적 연애를 즐겼던 우리 세대가 어떻게 보일지, 살짝 궁금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