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데 역마살도 유전인가 보다. 돌아가신 친정어머니는 ‘동네 반장이라도 해야 하는 팔자’를 타고나신 덕분에, 5남매 키우시는 와중에도 여고동창회 챙기랴 여선교회 일보랴 늘 공사다망하셨던 기억이 난다. 명색이 전업주부였던 시절에도 집안일에 몰두하는 엄마 모습을 보기는 어려웠다. 그러고 보니 우리 집 세 자매도 일 년이면 두어 번 얼굴을 볼까 말까, 저마다 바삐 돌아다닌다.
올여름 정년을 맞이하는 언니는 두 딸과 사위가 미국에 살고 있는 데다 자신도 인류학자로 전 세계 구석구석을 발로 누비고 다니기에, 가끔 안부 전화를 하면 “해외 로밍 중”이라는 소리가 들려와 순간 나를 뻘쭘하게 만들곤 한다. 나이 오십 넘어 목사 안수를 받은 여동생은 경남 삼천포에서 장애인을 위한 특수 목회를 하고 있는 남편을 위해 서울과 삼천포를 부지런히 오르내리고 있고, 요즘은 수화 통역이 필요한 곳이면 국내는 물론 해외까지 달려가느라 얼굴은커녕 목소리도 듣기 어려울 때가 많다.
나 또한 요즘은 농사를 짓느라 일주일이면 두 차례 이상 기차를 타거나 고속버스 신세를 지고 있다. 시간강사 시절엔 매주 춘천행 기차 타는 날을 손꼽아 기다리기도 했고, 한 학기 동안 매주 제주도까지 내려가 강의를 하고 그대로 서울로 돌아오는 강행군을 한 적도 있다.
신기한 건 오래전 도사님이 들려준 말씀이 문득문득 생각날 때가 있다는 사실이다. “인생에도 사계절이 있어 지금이 차가운 겨울 같아도 곧 봄이 올 것이니 크게 낙담할 것 없고, 행여 인생의 전성기에 있는 것 같아도 결코 자만하지 말고 겨울에 대비하는 것이 현명할 것”이라는 말씀은 지극히 상식적이지만 뜻밖에 힘이 될 때가 있다.
“당신은 편기(偏氣)가 자주 들어오니 중요한 시기마다 당신이 결정하지 말고 상황이 당신을 선택하도록 하라”는 말씀은 알 듯 모를 듯 아리송하지만, 시간이 지나 도사님 말씀의 의도를 알아챌 때가 종종 있다. “이름에 들어간 어질 인(仁)자는 참을 인(忍)의 의미도 있으니, 험난한 세상에서 어질게 살려면 참을 일도 많겠거니 생각하라”던 말씀도 은근히 위로가 되곤 한다.
“아무리 인공 관수(灌水) 시설을 해주어도 하늘에서 내리는 비를 따를 수 없으니 결국 농사는 하늘이 도와주셔야 한다”던 동네 어르신들 말씀은 요즘 내 삶의 금과옥조 중 하나다. TV 앞에 앉아 이번 선거의 개표 결과를 보자니, 하늘이 도와주는 기운이 있어야 인생도 잘 풀릴 것만 같다는 생각이 든다.
이번 선거에서 당선의 영광을 안은 분들은 사주에 명예나 관운이 있는 분들이었을 테고, 낙선의 아픔을 겪은 분들은 좋지 않은 편기가 들었거나 운이 따라주지 않았을지도 모를 일 아닌가. 인생이란 장애물을 넘고 장벽을 뚫었을 때의 짜릿함 못지않게 주어진 운명에 순응할 때의 편안한 여유로움도 참으로 값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