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병호의 독서산책] 이덕일 ‘조선왕조실록1’

입력 2018-07-30 10: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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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스로 선비임을 내세웠던 조선의 왕들

조선실록에 바탕을 둔 작가 이덕일의 집필이 시작됐다. 이덕일의 ‘조선왕조실록1:태조’(다산초당)는 역성혁명을 이뤄낸 태조의 일대기와 혁명의 의미를 풀어낸 책이다. 앞으로 계속될 총 10권의 소개글이 주목을 끌기에 충분하다.

조선왕조 518년 동안 모두 27명의 임금이 있었다. 평균적으로 19년 동안 재위에 있었는데 이들 가운데 후대의 후한 평가를 받는 왕은 드물다. 더욱이 조선왕조의 끝은 한국 근대사의 비극과 맞물려 있기 때문에 일반 독자들의 조선에 대한 인상이나 평가는 후하지 않다. 그러나 초기 역사는 그 어떤 왕조사와 비교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활력이 넘쳤다. 무엇보다 조선은 왕이나 특정 기관이 독주하지 못하도록 상호 견제의 원칙이 엄격하게 집행된 사회였다. 놀라운 점은 왕에 대한 언행이 가감없이 ‘조선왕조실록’에 기록돼 있다는 것이다. 작가는 조선을 두고 후한 평가를 아끼지 않는다. 작가는 “조선의 국왕은 스스로 선비임을 내세웠고, 사론을 중시했다”며 “이것이 때론 양반 사대부의 기득권 옹호나 사대주의 성리학에 대한 신봉으로 나타나는 폐단도 있었지만, 목에 칼이 들어와도 할 말은 하고 지켜야 할 것은 지키는 선비정신이야말로 조선의 정신 세계를 이끌어간 핵심이라고 할 수 있다”고 평가한다.

이 책은 고려 말엽의 혼란스러웠던 상황과 원나라와 명나라 출현의 전후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또한 역성혁명의 권력을 쥔 태조 이성계의 활동상과 그 의미를 찬찬히 기술하고 있다. 고려 말엽의 토지 문제는 고려가 망하지 않을 수 없는 이유를 제공한다. 고려는 농민들이 국가로부터 군전을 받고 그 대가로 군복무를 하는 체제를 유지해 왔는데, 군전이 소수 가문에 집중되면서 몰락의 길을 걷게 된다. 결국 어떤 국가의 역사를 보더라도 흥망성쇠는 표면적인 이유 그 뒷면에 실린 경제적 요인이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것을 다시 확인하게 된다. 고려 말엽은 국내 정치에 원나라의 영향력이 아주 컸는데, 특히 원나라 공녀로 간 누이가 기황후로 등극한 기철 일가가 유명하다.

한국인들은 두만강과 압록강을 경계로 한국의 영토를 구분 짓는 데 익숙하다. 작가는 다양한 자료를 바탕으로 해서 압록강과 두만강 이북의 상당한 부분이 원나라에서 잠시 차지한 것을 제외하면 고려의 땅이었음을 주장한다. 조선 숙종 때에 와서야 비로소 중국이 이 땅을 가져간다. 고려가 가진 모순점을 해결하기 위해 치밀한 계획에 따라 조선을 건국하는 태조 이성계에게는 뛰어난 인재 정도전이 있었다. 이성계는 7년간(1392~1398) 왕좌를 지켰다. 왕좌에서 쫓겨난 이후 10년을 더 살다 세상을 떠났다. 자료에 의하면 이성계는 겸양이 몸에 밴 무장으로 주변 사람들의 신망을 두루두루 받았던 인물로 통한다. 이것이야말로 그로 하여금 권력의 정점에 서도록 만들었던 힘 가운데 하나로 꼽을 수 있다. 이성계의 업적 가운데 하나는 조선의 개국이고 또 다른 하나는 북벌이었다. 그는 정도전의 힘을 빌려서 토지제도를 개혁하여 민생을 안정시킨 군주였다.

조선 개국 초기는 원나라로부터 주원장이 일으킨 명나라로의 권력 이동기였다. 이성계와 정도전은 두만강과 압록강 이북의 북방 영토 회복에 대한 강한 염원을 지니고 있었으며 구체적으로 실행 계획을 갖고 있었다. 태종 이방원이 일으킨 왕자의 난이 이 계획을 무산시키고 만다. 학계의 엄밀한 고증이 필요한 주장이기는 하지만, 작가는 “정도전이 살아 있어서 조선군을 북상시켰다면 고구려의 기강 회복이 손쉽게 이루어질 수 있는 상황이었다”고 안타까워한다. 당시 명나라는 제위(帝位)를 놓고 죽고 죽이는 내전이 계속되었기 때문이다. 조선조의 보기 드문 씩씩함을 알게 해 준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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