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이트칼라의 그림자 노동下] 보수적 은행, “KPI ‘단기실적 위주 평가’ 탈피해야”

입력 2018-08-10 10: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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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행장 1인 지배체제 '직원 불만 억누르기 바뻐'…금융당국 '무관심' "소비자 보호로 접근해야"

[편집자주]숫자를 추구하고 숫자로 기억되는 곳, 바로 은행이다. 6조6609억 원. 올해 상반기 6대 시중은행(KB국민·신한·우리·KEB하나·NH농협·IBK기업은행)의 당기 순이익이다. 저마다 '영업1등'을 목표로 내세운 결과물이다. 평균 연봉 1억 원 육박. 은행원에 대한 탐욕적 색채를 입힌 불편한 이름표다. 이러한 이름표로 취업 준비생은 물론 대다수 직장인에게 선망의 대상이다. 그러나 이면에는 ‘리딩뱅크’를 향한 과도한 업무와 끝없는 실적 경쟁에 목숨을 잃는 은행원이 있다. 고액 연봉 꼬리표는 은행 직원들의 노동을 가벼이 취급하고, 그들의 과로를 돈과 등가교환한 것처럼 간주하게 했다. 하지만 높은 임금도 법을 넘나들고 인간의 존엄을 상실한 노동을 정당화하긴 어렵다. ‘이투데이’가 삶을 잃거나 포기하는 은행원의 현실을 들여다보고 문제와 해법을 고민한다.

금융업은 안정을 추구하는 업종이다. 위험 관리가 생명이고, 조직 생존을 좌우한다. 변화와 위험을 싫어하는 분위기는 조직 문화에 스며든다.

10일 근로복지공단에 따르면 2013~2017년 최근 5년간 KB국민은행, 신한은행, 우리은행, KEB하나은행, NH농협은행, IBK기업은행 등 6개 시중은행에서 31명이 뇌심혈관 질환, 우울증 등으로 목숨을 잃었다. 금융·보험업 전체를 보면 2016년 7명이었던 산업재해 사망자는 지난해 19명으로 크게 늘었다. 직원들이 목숨을 잃고 있으나 은행은 그대로다.

◇한낱 ‘장사꾼’ 전락… 실적 중심 문화 바뀌어야 = “은행 직원들이 고객보다 ‘핵심성과지표(Key Performance Indicator·KPI)’ 위주로 생각할 수밖에 없다.” 실적에 죽고 사는 은행원의 단면을 보여주는 말이다. 그럼에도 은행원들도 영업 기반 조직에서 KPI 제도는 불가피하다고 인정한다.

문제는 KPI가 단기성과 항목에 집중돼 있어 정작 은행의 장기적인 경쟁력을 떨어뜨린다는 점이다. 한국금융연구원은 올해 초 ‘국내은행의 영업점 성과 평가 방향성에 관한 연구:KPI 개선을 중심으로’라는 보고서에서 “영업점 KPI를 현행 단기 실적 지표뿐만 아니라 고객만족도와 건전성 등 장기성과 지표를 함께 운용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실적 위주의 KPI 운영이 장기적으로 은행의 건전성을 악화시키고, 대규모 소비자 피해를 초래할 수 있다고 봤다.

KPI가 개별 영업점의 특성을 제대로 반영하지 못하는 점도 또 다른 문제다. 현재 KPI는 금융지주나 본부에서 목표를 설정하면 각 영업점이 따라가는 방식이다. 영업점 자율성이 없고, 주어진 목표를 따라가기 급급하다. 게다가 서로 규모가 다른 지점 간에 상대 평가로 진행하기 때문에 불공정한 경쟁이 생긴다. 전국금융산업노동조합 관계자는 “은행의 고수익은 모두 현장과 본점 직원들이 과도하게 경쟁해서 만들어진 것”이라며 “영업점 자율성을 인정하고 본부의 목표가 무분별하게 KPI에 녹아드는 것을 막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금융노조는 올해 산별임단투 주요 요구안에서도 내년부터 현행 KPI 제도를 전면 개편할 것을 요구했지만 산별교섭은 결렬된 상태다.

전문가들은 우선 KPI에 정성적 평가를 반영하고, 평가 단위를 다양화해야 한다고 지적한다. 미국 웰스파고(Wells Fargo) 사례가 대표적인 예다. 웰스파고는 2016년 9월 불건전 영업행위로 유령계좌 사태가 터진 이후 KPI에 고객 지표 비중을 높인 정성 평가 방식을 도입했다. 상품 교차판매 지점별 목표를 삭제하고 고객 유지 및 계좌 사용 빈도 관련 인센티브를 제공했다. 고객 만족도 조사를 기반으로 KPI를 재구성하고 불건전 영업행위를 감시하는 항목도 추가했다. 김상봉 한성대 경제학과 교수는 “고금리 대출 장사를 하며 순익 높은 상품 위주로 영업한다면 대부업체와 다를 게 없다”며 “KPI 지표에 수익성보다는 리스크 관리, 고객 보호 등의 비중을 늘리는 방식으로 바꿔나가야 한다”고 말했다.

◇은행장 ‘1인’ 지배… 보수적인 문화 바뀌어야 =은행은 주인이 없다고들 한다. 애초 금융은 총수 1인이 소유하지 못하도록 규정했다. 대주주 자격도 엄격하다. 산업자본(비금융주력자)이 금융회사 지분을 10% 이상 소유하지 못한다. 그마저도 4% 이상은 의결권이 제한된다. 언뜻 보면 투명하고 엄격한 지배구조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다르다. 주인 없는 곳에 ‘최고경영자(CEO)’란 이름으로 주인 행세를 하고 있기 때문이다.

“부장까지는 자기 능력대로 승진하지만, 부장 이상으로는 마음대로 안 된다. 부장 이상 되면 어디에 줄을 서는지가 중요하다. 예를 들어 회장(CEO) 임기가 3년이면 그 안에 ‘결판’을 봐야 한다. 괜히 줄을 잘못 섰다가 눈 밖에 나면 금방 임금피크제 대상이 된다.” 한 시중은행 임원의 말이다. 직원은 부장, 부장은 임원, 임원은 CEO 눈치를 보는 ‘눈치싸움’이 벌어지는 것이다.

승진에 목을 매고 ‘윗선’ 눈치를 보는 문화가 팽배한 곳에서는 직원의 불만을 억누르기 바쁘다. 조직 발전에 도움이 되는 아이디어를 내도 실제 반영되기 어렵다. 한 시중은행 직원은 “굉장히 폐쇄적이고 보수적인 곳이 은행이다. 인사권은 지점장에게 편중돼 있다. 당연히 아부하는 문화가 팽배하다. 복장과 인사, 말투 등 모두 윗사람이 원하는 대로 한다. ‘윗사람이 좋아하니 그냥 하라’는 말이 조직을 병들게 하고 있다”고 토로했다.

CEO 중심의 보수적인 문화를 바꿀 방법은 없을까. 김진방 인하대 경제학과 교수는 “노동자가 경영에 참여하는 수단인 ‘사주조합’이나 ‘노동 이사제’ 등이 현 상황에서 CEO 견제 수단으로 적절할 수는 있다”면서도 “결국 시급한 것은 일반 투자자와 채권자들이 경영에 참여할 수 있는 시스템을 마련하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투자자와 소액주주, 예금 채권자 등 여러 이해관계자가 적극적으로 의견을 내 조직 문화를 바꿔야 한다는 지적이다.

◇금융당국 ‘무관심’… 소비자 보호로 접근해야 =금융당국은 은행 등 금융권 노동자 실태와 관련, “감독사항이 아니다”라는 입장이다. 금융기관 건전성과 준법성 검사를 할 뿐, 직원 근무환경과 복지는 담당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나 최근 ‘소비자 보호’를 최우선 목표로 내세운 금융감독원이 정작 중요한 부분을 놓치고 있는 것 아니냐는 지적이 나온다.

은행의 지나친 단기 성과주의와 과다한 업무는 소비자 피해로 이어진다. 실적 압박에 시달리는 직원들은 고객 이익보다는 수익이 많이 남는 상품을 판매한다. 인사고과에 영향을 미치는 KPI가 ‘수익성’을 중점적으로 보기 때문이다. 직원들은 KPI 기준에 맞게 카드와 방카슈랑스 등 가입을 유도하는 편이라고 한다. 긴 노동시간에 허덕이다 보니 정작 상품을 공부할 시간은 부족하다. 은행원이 이해하지 못한 상품의 판매는 그대로 ‘불완전 판매(금융회사가 위험도 등을 제대로 설명하지 않고 상품을 판매하는 것)’라는 악순환으로 돌아온다.

금융회사에 ‘효율성’을 강조하는 금융위원회를 비판하는 목소리도 나온다. 금융당국의 한 관계자는 “금융당국에서 말하는 ‘업무 효율성’이 사실상 인력 구조조정 아니겠냐”며 “이 때문에 금융회사 노동자들의 업무 스트레스가 높아진다”고 속내를 내비쳤다.

금감원 역시 2~3년에 한 번 실시하는 경영실태평가에서 ‘수익성’ 측면을 가장 많이 본다. 건전성과 연결돼 있다는 판단에서다. 이 관계자는 “수익성뿐만 아니라 수익을 직원들과 나눴는지 등 사회적 책임 등을 고려한 평가체계를 마련해야 할 때”라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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