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
그러고 보면 우리는 좋은 의미로든 나쁜 의미로든 킬링(killing)의 말, 섬뜩한 용어를 습관적으로 쓰는 경우가 많다. 흔히 “죽여준다”는 말을 하는 것도 그렇다. “배고파, 힘들어 죽겠다”라고 쓰기도 한다. 재차 확인하는 것을 ‘확인 사살한다’고 표현한다. 말은 곧 생각이다. 사람이 말을 만들었지만, 말이 사람을 만든다는 것 또한 진실이다.
정확히 말해 서양의 레토릭(rhetoric)은 수사학(修辭學)이라기보다 유세술(遊說術)에 가깝다. 서양에서 말, 레토릭이 웅변술, 설득술이라면 동양에서 말은 설득이라기보다 도덕적 수양이다. 수사학은 글자 그대로 말 내지 마음을 닦는 것이지, 말을 꾸미는 것은 아니다. 서양에서 언변이 연금술이라면 동양에선 말이란 연마술에 가깝다.
감정과 언어 절제는 동전의 양면으로 인물 평가의 중요 척도였다. 리더의 말 공부는 킬링의 공격이 아니라 힐링의 자기방어술이었다. 말을 닦음으로써 마음을 닦는 것이다. 서양에서 ‘리더의 언어’가 주로 출세의 무기로 받아들여졌다면, 동양에서 ‘군자의 언어’는 마음 공부의 수단으로 인식됐다. 어떤 말을 할 것인가의 언변보다 어떤 말을 하지 말아야 할 것인가 하는 언잠(言箴)을 중요시한 까닭이다. 말로 흥하는 것보다 말로 망하지 않는 게 급선무였다. 공자가 조카사위를 고른 기준도 바로 말의 절제, 연마 습관이었다. 말을 잘하는 것보다 말을 조심하는 것을 높이 샀다.
“너는 하는 말을 삼가며, 네 위의(威儀)를 공경히 하여, 유순하고 아름답지 않음이 없게 하라. 보석[白圭]의 흠집은 오히려 갈아서 없앨 수 있거니와 말의 흠집은 그렇게 할 수 없느니라[白圭之점 尙可磨也 斯言之점 不可爲也].”
제자 남용이 이 시를 하루에도 여러 번씩 읊었다. 공자는 그 모습을 보고 당장 조카사위로 삼았다. 그러면서 “나라에 도가 있을 때는 쓰일 것이고, 나라에 도가 없을 때라도 형벌을 면할 것이다”라고 평했다. 최소한 자기 성질을 못 이기는 바람에 욱해서 말로 공격하거나 남에게 상처를 줘 화를 부르는 일은 하지 않을 것이라고 봤다.
상대방을 흠집 내고 헐뜯는 말을 ‘독설’(毒舌)이라 한다. 독설은 꼭 욕설이 아니더라도 편견, 재단, 차별, 심판, 근거 없는 의심 등 독소를 품은 말이다. 모래알이든, 바윗돌이든, 큰 못이든, 작은 못이든 마음에 상처를 남기긴 매일반이다. 욕할 욕(辱), 헐뜯을 비(誹), 헐뜯을 방(謗)의 한자 어원을 보면 그 폐해를 짐작할 수 있다. 욕할 욕(辱)은 손(寸)에 농기구(辰)를 들고 죽어라 김을 매는 모습이다. 헐뜯을 비(誹)는 사실이 아닌(非) 말로 남을 비난하는 것이다. 헐뜯을 방(謗)은 곁에서(旁) 말로 잘못을 나무라는 모습이다. 사실이 아닌 것을 가지고 포위해 옆에서 하는 공개 비난, 그것은 하루 종일 김매는 것 이상으로 몸과 마음을 해친다.
얼마 전 김포 맘카페에서 ‘어린이 학대범’으로 몰려 SNS로 인민재판을 받은 교사가 자살했다는 언론보도가 있었다. 그 사건의 여파가 채 식지 않았는데 그 교사를 찾아가 항의한 여성에 대해 신상 털기, 공격성 댓글이 이어지고 있다는 뉴스를 보니 망연자실하다. 공격의 방향은 바뀌었지만 그 양상은 같아서다.
옛사람들은 군자가 조심해야 할 삼단(三端)으로 문사의 붓끝, 무사의 칼끝, 변사의 혀끝을 들었다. 오늘날 여기에 더해야 할 또 하나의 끝은 SNS 손끝이 아닌가 한다. SNS 악성 댓글, 퍼나르기, 신상 털기의 폐해는 무겁고도 무섭다. 힐링의 말은 못할망정 킬링의 말은 조심해야 하지 않을까. 날카로운 언변보다 묵직한 언잠의 지혜가 아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