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회를 이끄는 여성 리더④] 정춘숙 "2018년은 역사에 남을 해…가정폭력방지법 개정돼야"

입력 2018-11-27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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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년 여성운동 '현장통'…여성 운동 이력, 법안으로 보여주고 있어

"여성에 대한 폭력 문제는 성차별에서 출발합니다. 여성은 문화적, 사회적, 경제적으로 힘없고 돈 없고 권력도 없어서 막 해도 된다고 생각하는 거죠. 이 놀라운 차별과 폭력을 참을 수가 없습니다."

정춘숙(54)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분노를 힘으로'라는 말을 외치는 이유다. '여성이 처한 현실을 목도할 때 화가 나서 참을 수가 없다'는 그는 치밀어오르는 화를 여성의 삶과 세상을 바꾸는 힘으로 만들어야 한다는 신념으로 살고 있다.

지난 19일 서울 여의도 국회 의원회관에서 정 의원을 만났다. 그는 한국 사회의 여성 혐오 관련 범죄를 직접 수집한 '현장통'이다. 성폭력 전문상담기관인 한국여성의전화에서 23년간 상근하며 다양한 여성정책을 제안했다.

▲정춘숙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19일 서울 여의도 국회의원회관에서 이투데이와 인터뷰를 가졌다. 오승현 기자 story@

1998년 가정폭력방지 및 피해자 보호에 관한 법률(가정폭력방지법) 수립 과정에서 시행령·시행규칙 발표까지 총괄하는 실무자 역할도 했다. 이를 토대로 가정폭력방지법 외에도 성평등이나 여성과 관련된 정책에 대해 꾸준히 목소리를 내고 있다.

그의 여성운동 이력은 대학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대학교 3학년 때인 1984년 탈패(탈춤패) 회장을 맡게 됐는데, 이 감투를 쓰기까지 우여곡절이 있었다. 당시 탈패 회원은 곧 운동권을 의미했다. 그는 스스로 탈패의 '여성' 회원이라고 생각하지 않아 누구보다 적극적인 활동을 펼쳤다.

"선배들이 2학년 때 들어온 알지도 못하는 남자애한테 회장을 시키더라고요. 경찰은 그 친구가 회장이 됐다는 소식을 확인하자마자 그의 부모에게 알렸어요. '탈패 회장이 되면 감옥에 간다'고요. 결국 그 친구는 부모의 압력으로 군대에 갔죠. 회장할 사람이 없어지니 그제야 저를 시키더라고요. 저는 가장 먼저 들어갔고, 리더십도 있는데도 '차선'이 됐죠. 그런 성차별 경험들이 많았어요."

정 의원은 학생 운동에서 노동 운동으로 이력을 이어갈 때도 자신 앞에 '여성'이라는 수식어를 내세우지 않았다. 여타의 회원들처럼, 아니 그보다 더 최선을 다했다. '학출'(학생운동 출신)이라는 제약 속에서 위장 취업을 했고, 감옥에도 다녀왔다.

"운동권에 몸담으면서 구로에 있는 공장에 위장 취업을 했어요. 그러다 안산으로 갔죠. 하지만 대학에 나왔고 감옥에 다녀왔다는 이유로 취업이 되지 않으니까 현장 노동자로 살 수 없더라고요. 정말 다른 남자들과 똑같이, 혹은 그 사람보다 더 치열하게 운동을 했어요. 그 과정에서도 늘 성차별이라는 벽에 부딪혔어요. 사회에서 가장 진보적이라고 하는, 평등·정의·민주화를 얘기하는 사람들에게서 성차별을 받은 거죠."

▲정 의원은 23년간 한국여성의전화에서 근무하면서 여성 폭력을 가장 가까운 곳에서 마주했다. 오승현 기자 story@

학생운동·노동운동을 하면서도 성차별 문제에 대해 그냥 지나칠 수 없었던 그에게 여성운동은 '업(業)'으로 다가왔다. 평생 할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1992년 6월, 대선을 앞둔 시기였다. 선배들은 '이렇게 중요한 시기에 여성운동 같은 데는 가면 안 된다'며 반대했지만, 그를 막을 순 없었다.

정 의원은 2015년 1월까지 전국 25개 지역에 지부가 있는 한국여성의전화에서 전국 상임대표 등을 지냈다. 2006년에는 서울여성의전화 회장을 맡았다. 한국여성의전화에서는 3년 임기의 대표직을 연임했다. 모두 9년이다. 이제 그가 맡을 수 있는 일이 없다고 느껴졌을 때, 정치권의 러브콜을 받게 됐다.

"주변에서 늘 '너는 정치를 하는 게 참 좋겠어'라고 했어요. 그러다 더불어민주당이 굉장히 어려웠을 때인 2015년 6월 '김상곤 혁신위원회'의 위원으로 제안을 받게 됐어요. 우연한 기회였죠. 시민단체 출신 리더가 필요했는데, 현직이 아니었기 때문에 가능했어요. 그리고 2016년 20대 선거 비례대표에 선출 됐습니다."

정 의원은 국회에 입성하면서 국회에서 '꼭' 해야겠다고 생각했던 일들을 잔뜩 챙겼다. 1994년부터 1998년까지 가정폭력방지법 제정 과정에서 실무 작업을 했기 때문에 국회 시스템은 어느 정도 알고 있었다. 국회 밖에서 느꼈던 답답함은 국회에 들어온 이후에도 계속됐다.

그러던 중 지난달 22일 강서구 등촌동의 한 아파트 주차장에서 전(前) 부인 살인 사건이 발생했다. 사건 이면에 극심한 가정폭력이 숨어있었다는 사실이 알려졌고, 여론은 가정폭력 피해자에 대한 처벌을 강화하고 피해자 보호 규정을 강화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올해로 시행 20주년을 맞은 가정폭력방지법을 전면적으로 손봐야 한다는 지적도 나왔다. 현행법은 경찰이 가해자를 체포할 권한을 규정하고 있지 않아 현행범이 아닌 한 적극적인 체포가 어렵기 때문이다. 수사로 가정폭력을 확인해도 가해자는 '상담조건부 기소유예' 제도로 처벌 대신 상담만 받을 수 있다.

자연스레 국회에서 많은 의원으로부터 수차례 발의된 가정폭력방지법 개정안에 시선이 쏠렸다. 남편이 아내를 살해하는 등 가정폭력 살인 사건들이 해마다 국민적 공분을 사고 있지만 20대 국회에서는 관련 논의가 전혀 이뤄지지 않고 있다.

"반드시 개정안을 관철해야 합니다. 사실 처음에는 가정폭력방지법이 잘못됐다는 말에 동의하기 어려웠어요. 제가 실무를 했기 때문에요. 하지만 이제 알았어요. 법조문이 잘못 만들어진 게 아니라 법이 시행되는 대한민국의 현실을 참작하는 과정에서 부족함이 있었다는 것을요. 그래서 개정안을 냈어요. 다른 의원님들도 개정안을 많이 내셨는데, 계류돼 있어 굉장히 답답합니다."

▲정 의원은 "'가정폭력방지법' 개정안이 하루빨리 통과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가정폭력방지법 수립 과정에서 시행령 발표까지 실무 작업을 도맡은 그는 여전히 가정폭력이 뿌리뽑히지 않는 현실이 안타깝다고 했다. 오승현 기자 story@

국회 여성가족위원회 국정감사에 등촌동 살인사건 피해 유가족을 참고인으로 부른 것도 정 의원이다. 그는 '당사자의 힘'을 위해 이 같은 선택을 했다.

"마음이 무거웠습니다. 제가 가정폭력을 문제라고 다룬 기간만 20년이 넘는데, 아직도 기초적인 문제가 해결되지 않아 사람이 죽었습니다. 그 딸들의 상처는 정말 깊을 거예요. 그 깊은 상처를 보호해주거나 숨겨주지 못하고, 꺼내 보이라고 말을 해야 했어요. 그분들이 직접 말하는 게 국회에 계시는 의원님들이 현실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겠다는 마음에서 그럴 수밖에 없었죠."

그는 앞서 성폭력 근절과 피해자 보호 등을 위한 법안인 '미투 1호 법안'도 발의했다. 이른바 '여성폭력방지법'이다. 여성폭력은 여성에 대한 신종 성폭력이라는 것이라고 정의하고, 여성폭력 전담기구를 만들며 성범죄 피해자에 대한 조건 없는 지원을 강화해야 한다는 게 법안의 골자다.

"그동안 성폭력범죄 처벌에 관한 특례법, 가정폭력범죄 처벌에 관한 특례법, 성매매 방지법 등 따로따로 돼 있어서 단절된 지점들이 있었거든요. 최근 디지털 성범죄도 법안이 제대로 마련되어 있지 않아 난리가 났잖아요. 앞으로 발생할 수도 있는 새로운 폭력을 대비하기 위해 포괄할 수 있는 기본법을 세우자는 거죠."

특히 법안에는 여성에 대한 폭력방지와 피해자 보호 지원에 대해 국가가 책임져야 한다는 내용이 담겼다. 아울러 여성폭력의 특수성을 반영한 피해자 지원 시스템을 마련하고, 성평등 의식 확산 및 여성폭력 예방을 위한 폭력예방교육 체계를 재정립하는 내용도 포함됐다. 초·중·고의 정규 교과목으로 성평등과 인권을 다룬 과목이 설치되어야 한다는 식이다.

"기본 통계를 세우고, 교육을 하고, 국가가 피해자를 지원하도록 기본적인 그림을 거리는 거죠. 여성들은 절실합니다. '미투' 운동 나아가 강남역 살인사건을 계기로 젊은 여성들이 여성 문제에 굉장한 관심을 갖게 됐어요. 여성에 대한 폭력 문제가 어떤 특이한 여자에게 발생하는 일이 아닌, 아무 문제 없는, 아주 유능한 여자들도 겪을 수 있는 일이라는 것을 보여줬죠. 2018년은 역사에 길이 남을 해가 될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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