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건 중 7건 담보 대출… 생산수단보다 안전자산 ‘땅’ 우대
그는 거저먹는 자들이 만드는 자들을 압도하고 있다고 말한다. 투자 등 기업에 숨결을 불어넣는 금융 본래 기능은 약화하고, 어떻게든 돈을 굴려 자신의 수익을 창출하고 빈부 격차를 심화시켰다는 지적이다. 윤 원장은 한 언론에 이 책을 추천하며 “새로운 성장동력과 일자리 창출이 절실한 지금, 금융이 어떤 역할을 해야 할지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했다.
2017년 기준 국내은행의 총자산은 2363조 원이다. 같은 해 글로벌 기업 삼성전자 등 총자산 기준 10대 기업을 합쳐도 1000조 원대에 불과하다. 그럼에도 시중은행들은 IMF 외환위기와 2008년 금융위기를 거치면서 안정성 높은 가계대출에 치중해왔다. 금감원 은행경영통계에 따르면 1995년 당시 55.9%에 이르던 중소기업 대출 비중은 지난해 43.6%로 줄었다. 그나마 2015년 이후 임대사업자 등 개인사업자 대출이 늘어나 증가 추세로 바뀌었다. 가계대출은 같은 기간 17.5%에서 43.2%로 증가했다. 2008년부터 가계대출 증가율은 연평균 6.2%로 기업대출 증가율(5.4%)을 훌쩍 넘는다.
은행들이 가계대출에 집중하는 이유는 한 가지다. ‘돈’을 벌기 쉬운 방법이기 때문이다. 우선 가계대출은 리스크 관리가 쉽고 떼일 우려가 적다. 가계대출의 이자수익률(대출금을 이자수익으로 나눈 값)에서 대손률(대출금을 대손비용으로 나눈 값)을 뺀 값이 기업대출보다 높다. 국제결제은행(BIS) 자기자본비율을 계산할 때도 위험 가중치가 낮은 가계대출이 유리하다.
◇담보·보증 대출이 10곳 중 7곳 = 국내 시중은행의 중소기업 대출은 그마저도 ‘담보’나 ‘보증’ 대출 위주다. 2017년 말 기준 중소기업 대출에서 담보 대출이 차지하는 비중은 58.1%에 이른다. 2010년(42.9%) 이후 꾸준히 늘어났다. 최근에는 공장 등 생산수단이 아닌 ‘땅’을 우대한다고 한다. 한 금융권 관계자는 “최근에는 담보도 공장이 아닌 땅을 보고 있다”며 “완전히 안전한 보증이 있어야만 대출을 내주는 것”이라고 했다. 기술보증기금이나 신용보증기금 등 보증기관이 발급한 보증서를 기반으로 내주는 대출이 12.9%다. 10곳 중 7곳은 담보가 충분하거나 보증을 선 공공기관이 대출을 대신 갚아줄 때만 돈을 빌려준다는 의미다.
2008년 46.9%에 달했던 중소기업 신용대출 규모는 31.6%로 쪼그라들었다. 사업을 오래 하고 매출이 큰 우량 기업이 전체 신용대출의 71.7%에 달한다. 최근 시중은행이 중소기업 대출을 늘리고 있으나 ‘출혈 경쟁’이라는 비판이 나오는 이유다. 전체적인 중소기업 시장을 키우는 것이 아니라 우량 기업을 고객으로 삼기 위한 뺏고 뺏기는 경쟁을 하는 것이다.
기술이 있더라도 담보가 없는 스타트업이나 벤처기업이 대출을 받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아이디어만으로 2015년 창업해 60억 원 이상 투자를 받은 한 벤처기업 관계자는 “대부분 벤처캐피털(VC)에서 돈을 조달하고 있다”고 했다. VC는 일반 금융회사에서 돈을 빌리기 어려운 벤처기업에 무담보 주식투자 형태로 투자하는 자본이나 기업을 의미한다.
물론 은행들도 할 말은 있다. 한 시중은행의 기업금융 담당 부행장은 “개별기업의 신용등급을 다 봐서 호의적으로 잘 해주고 싶다”면서도 “(경기가 어려울수록) 리스크 관리를 잘하고 한 번 더 심사해야 한다”고 했다. 현재 정부가 ‘생산적·포용적 금융’을 말하지만, 위기 발생 시 강한 리스크 관리에 나설 수 있다는 것이다.
다른 시중은행의 여신관리 담당 부행장은 “은행이 대출을 중단하고 만기를 연장하지 않는다고 말하지만 그렇게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라며 “진짜 리스크가 커지고 어렵다면 회사와 협의해 대출을 분할 상환하게 하거나 상환금액을 조정하는 등 여러 방법을 고민한다”고 했다.
◇객관적인 평가모델 개발 필요… ‘관계형 금융’도 고민해야 =그럼에도 담보가 없는 중소·벤처기업의 기술력과 잠재력을 따져 자금을 지원해주는 방안을 고민해야 한다는 지적이 꾸준히 나온다. 다만 섣부른 접근은 위험하다. 박근혜 정부가 2014년 도입했던 ‘기술금융’은 지난해 10월 말 기준 160조 원을 돌파했다. 기술력과 성장 가능성을 평가해 자금을 지원하는 방식이다. 그러나 금융위원회가 매년 두 차례 순위를 발표하면서 은행 간 경쟁에 불을 붙였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일부 은행이 기존 중소기업 거래 기업을 기술금융에 편입시키는 등 주먹구구식으로 이뤄지고 있다.
최근에는 ‘지식재산 금융’, ‘일괄 담보제’ 등 기술금융을 대체·보완하는 용어들이 새롭게 떠오르고 있다. 모두 기존 담보 중심 대출에서 신용 중심으로 바꾸는 게 목적이다. 하지만 지나친 양적 성장 위주의 속도전으로는 기술금융과 같은 ‘속 빈 강정’이 될 우려가 크다. 금융당국의 한 관계자는 “지식재산권 금융의 경우 시장이 활성화되려면 이를 사고팔 시장이 있어야 한다”며 “인프라가 부족한데 하루 아침에 되는 게 아니다”라고 지적했다. 은행마다 독자적인 내부 평가 모델을 갖추기 위한 투자와 인력 확충 등이 필요하다.
독일이나 일본과 같은 관계형 금융도 대안이 될 수 있다. 중소기업 강국인 독일의 경우 은행이 자금 중개 기능이라는 전통적인 역할에 충실하다. 지역에 있는 영세 기업들은 지역금융회사를 주거래 은행으로 삼아 자금을 융통한다. 아이디어와 기술력만 있으면 주거래은행은 기업을 믿고 수년간 돈을 빌려준다. 우리나라도 관계형 금융 가이드라인에 따라 기업과 은행이 업무협약(MOU)을 맺는 방식으로 이를 도입했다. 은행은 MOU를 맺은 기업에 3년 이상 만기로 돈을 빌려준다. 대신 기업 정보를 받아 상시 모니터링할 수 있다. 10월 말 기준으로 7조4000억 원으로, 지난해 말(5조9000억 원)보다 1조5000억 원 가까이 늘었다.
“2008년 금융위기 이후 10년 동안 국내은행은 몸을 사려왔다. 그동안 가계대출을 늘려 예대마진으로 돈을 벌어 리스크도 적고 얻을 게 많았다. 다른 국가가 어려움에 처했을 때 우리나라가 금방 위기를 극복한 이유다. 그런데 과연 앞으로도 과연 리스크 관리만 해서 살아남을 수 있을지 생각해봐야 한다. 패러다임 전환이 필요한 시기가 아닐까 싶다.” 금융당국 관계자의 말이다. 금융회사로서 ‘건전성 관리’는 최우선 목표이지만, 단순히 ‘보신주의’로 이어져서는 안 된다는 경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