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론인, 전 코스카저널 논설주간
이 인터뷰를 읽은 직후 나는 그를 더 좋아하게 되었다. 그의 속 깊음에 더 감동하게 되었다. “내 연배의 동료들, 나와 비슷한 이미지로 연기를 하는 후배 연기자들을 위해 영화 출연은 자제했다”라는 그의 말은 “같이 먹고살겠습니다”를 실천했다는 고백이다. 읽은 지 10년은 더 된 이 인터뷰가 기억 속에서 뛰쳐나온 건 엊그제 한 책에서 결이 약간은 다르지만 결국은 이와 비슷한 이야기를 읽었기 때문이다. 그 이야기가 오랫동안 잊고 있었던 최 씨의 “같이 먹고살겠습니다”를 불러냈다.
오스트리아 수도 빈에 있는 가죽가방 전문점 ‘R.호른스’의 주인 호른 씨 이야기다. 2014년에 출간된 ‘빈을 소개합니다’라는 책에 나온다. 저자 노시내 씨에 따르면 올해 예순아홉인 그는 연극과 영화 일을 하다가 삼십대 중반에 수제가방 사업을 시작했다. 천직이 무엇인지 오래 고민한 끝에 가죽 일이 자신이 진정으로 하고 싶은 일임을 깨닫고는 뛰어들었다.
노 씨에 따르면 호른스 가방은 지난 30년간 빈에서 알아주는 업체로 성장하여, 빈의 생활과 문화 곳곳에 은근히 스며들었다. 약간 과장하면, 빈의 변호사 두 명 중 한 명은 여기서 만든 서류가방을 들고 다닌다. 그는 틈이 나면 옛 사진들을 검색해 세계적 문호나 지식인들이 실제로 지녔던 가방을 찾아내 복원했다. 토마스 만, 사뮈엘 베케트, 어니스트 헤밍웨이의 가방이 그렇게 해서 탄생했다.
노 씨가 “(다른 세계적 명품 업소처럼) 외국에 지점을 여는 등 사업을 확장할 계획이 없냐”고 묻자 그는 주저 없이 “그러면 관리를 위해 비행기로 여기저기 다니며 시간에 쫓기고 스트레스 받으며 살아야 되는데 그렇게 하고 싶지 않다. 지금도 돈은 충분한데, 더 번다고 행복해지냐? 확장을 하려면 지금의 소규모 공방도 달라져야 하며 그러면 품질 관리도 어려워지고, 고객 한 사람 한 사람의 필요에 맞추어 서비스를 제공하는 즐거움도 사라진다”고 대답한다.
노 씨는 그의 다음 말에 더 놀란 듯하다. “빈의 유명한 수제구두 업체 루드비히 리히터는 베이징에 지점을 열었는데?”라고 노 씨가 묻자 그는 “아, 그 집이야 아들 셋이 사업체를 물려받았고, 먹여 살려야 하는 식구가 스무 명이 넘으니까 그래야 할 것”이라고 대답했다.
자신과 그의 처지가 다름을 강조한 그의 대답은 “나는 이제 충분해. 더 잘 만들 생각은 있지만 더 많이 만들 욕심은 없어. 다른 사람들도 해야 하거든”으로 줄일 수 있다. 최불암 씨 대답과 크게 다르지 않다.
반면 “같이 먹고살겠습니다”는 많이 할수록 좋은 말, 많이 들을수록 좋은 말이다. 성경에도 나온다. “너희가 너희의 땅에서 곡식을 거둘 때에 너는 밭모퉁이까지 다 거두지 말고 떨어진 이삭도 줍지 말며… 가난한 사람과 거류민을 위하여 버려두라.”(구약 ‘레위기’)
올해는 ‘각자도생(各自圖生)의 해’가 될 거라고 한다. 경제가 크게 망가진 상태에서 누구도 도와주지 않는, 스스로 알아서 어려움을 헤쳐 나가야 하는 냉혹하고 잔인한 해가 될 거라고 한다. 하지만 각자도생이 어디 쉬운가? 단언컨대, ‘각자도생’의 결과로 죽는 사람이 더 늘어날 것이다. “같이 먹고삽시다”라고 말하는 사람은 줄고 “같이 먹고살겠습니다”라는 말을 하는 사람이 많아지면 몰라도.